효열공 준봉 고종후 선생 추모제 봉행
효열공 준봉 고종후 선생 추모제 봉행
  • 최정호 지역기자
  • 승인 2019.04.08 16:56
  • 1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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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문화원·진주향교 후원…충효 나라사랑 정신 계승
 6일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고개 준봉산 밑 효열공 신도비 앞에서 제4회 효열공 준봉 고종후 선생 추모제가 진주문화원, 진주향교 후원으로 봉행됐다.

효열공 준봉 고종후선생 기념사업회(회장 고영두)는 지난 6일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고개 준봉산 밑 효열공 신도비 앞에서 내외 귀빈 및 200여명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4회 효열공 준봉 고종후 선생 추모제가 진주문화원, 진주향교 후원으로 봉행됐다.


이날 헌시낭송, 내빈 소개 및 회장 인사, 헌관 분향, 헌작, 축문 독축, 분향, 추모사 순으로 진행했다.

고종후 선생은 1577년(선조 11년) 24세때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좌랑이 됐다. 금산 전투에서 부친 고경명, 아우 고인후가 순절하자 상중(喪中)에 군사 400명을 모아 별군을 조직해 복수 의병장으로 1593년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이때 성중에 장사들은 공의 애상(哀喪)중에 몸이 극도로 여윈 것을 염려하여 성을 나가라 권유 했으나 끝내 응종하지 않고 죽음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전투에 임했으나 성의 동문이 무너지고 적병이 개미떼 처럼 몰려와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러 김천일,최경회,고종후 공은 시 한수를 읊고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이후 선조 26년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지제교겸 춘추관 수선감, 예문관 직제학에 추증됐다.

고영두 회장은 “고종후 장군의 시조는 제주도에서 유래됐다며 조부는 맹영 대사간으로 좌의정에 추증됐고 부친 휘는 경명이니 뒷날 공조 참의로 좌찬성에 추증 되었고 시호는 충렬이며 호는 제봉이라 했다. 촉석루 삼장사 고종후 장군은 항상 대승적 입장에서 국가의 위난을 극복하고 오직 국왕과 국가 민족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에 기인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고종후 장군의 의병 모집의 복수문에는 한 삼태기 흙도 산이 되고 한치의 쇠붙이도 사람을 죽인다 했으니 각기 힘 닿는대로 하는것이지 꼭 구비 해야만 되리오. 이 말은 의병이 되거나 재물을 의병청에 내어 구국을 하자는 뜻이요. 이 외에도 각 사찰에 통문을 보내고 제주의 고씨, 양씨, 부씨, 에게도 재물과 전마를 보내달라는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집한 고종후 장군의 충절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며 다시한번 충효의 깊은 뜻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최정호 지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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