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죽음 없는 삶은 없다
칼럼-죽음 없는 삶은 없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4.09 15:25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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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산스님/금인산 여래암 주지
범산스님/금인산 여래암 주지-죽음 없는 삶은 없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불운하게 자란 사람들이 많다. 불운이 그들을 키워낸 고귀한 용광로였음으로 불운과 죽음을 겁내지 마라. 거친 자갈밭을 걸어야 강한 발바닥이 만들어진다.

중연가화합(重緣假和合)이라, 세상일은 항상 어려운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인생은 두더지 잡기”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다. 망치로 두더지머리 하나를 치면 또 다른 머리가 올라오고, 또 치면 또 올라오는 것처럼 삶은 어려운 일들의 반복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선한 마음을 잃지 말자. 우리는 빈손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니 더 많은 소유를 위해 마음을 더럽히지 말자. 우리는 지금 살아서 숨을 쉬고 있지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앞뒤처럼 하나여서 살아있다고 볼 수도 없다. 지구의 무게는 100명이 태어나던, 100이 죽던 똑같은데, 인간은 하나라도 더 끌어 모으러 애를 쓴다.

죽음이란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사를 가고 저승에서 또 다시 이승으로 윤회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생명체들은 오래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죽음이 닥치면 심한 공포를 느낀다.

인간의 죽음을 의학적 판단으로는 심장과 호흡정지를 기준하지만, 가끔은 한 때 심장과 호흡이 완전히 정지되었다가 기사회생하는 가사상태(假死狀態)의 경우도 있다.

불경에는 험래과(驗來果)란 말이 나온다. 그 사람의 죽는 모습을 보면 내세의 과보를 미리 증험한다는 뜻이다. 선업을 쌓으며 좋은 일 많이 한 사람이 죽을 때는 체온이 발바닥부터 식어서 배꼽에 이르며, 상체가 따뜻한 채로 죽으면 인도환생하고, 발바닥부터 식어서 머리까지 이르고, 정수리가 따뜻한 채로 죽은 사람은 천상의 세계에 태어난다 하였다.

악업을 쌓으며 나쁜 일 많이 한 사람이 죽을 때는 체온이 위로부터 떨어져서 배꼽에 이르고, 허리아래가 따뜻한 채 죽으면 아귀로 태어나며, 위로부터 식어서 무릎에 이르고, 무릎 아래가 따듯한 채 죽으면 축생으로 태어나고, 머리부터 발까지 식어서 발바닥이 따뜻한 채 죽으면 지옥에 태어난다고 한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라.

탐욕과 분노가 가득하여 평온하지 않으면 하루에도 수십 번 지옥을 왕복하게 되므로 마음을 고쳐먹어야한다. 죽음에는 천수를 누린 후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는 자연사와, 청춘에 질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죽는 우연사나 급사도 있다. 또한 요사(夭死), 객사(客死), 횡사(橫死), 원사(冤死), 분사(憤死)처럼 ‘제명대로 못 살고 간 원통한 죽음’도 있다. 그렇게 죽으면 원귀(寃鬼)가 되어 구천을 떠돌게 된다. 죽음은 천명을 누리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와석종신(臥席終身)즉, 반듯하게 누워서 편안하게 죽는 것이 최상의 죽음이다.

우리는 잘살다가 잘 죽어야한다. 100년을 헤아려보면 길고 지루한 세월 같지만 임종을 맞고 보면 하루아침 꿈이다. 나도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비겁하게 살지 말자.

교묘한 처세로 굽신 거리고 아부 잘한 재능으로 받은 상장이나 훈장이 사후보장까지 해주는 것은 아니다. 한번쯤 자신의 죽음을 위해 그동안 얼마나 준비해왔는가 살펴보자.

되는대로 살다가 황망하게 죽지 않으려면 선업을 쌓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남에게 피해주지 말고 선하게 살아가자.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노인들을 보라. 오래 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옛날에는 아기가 태어나면 모두 기뻐하면서 ‘오래 살라’는 뜻으로 금줄을 쳐주었고, 첫 돌때는 긴 실을 안겨 주었지만, 죽음 없는 삶은 없었다. 수행자는 죽더라도 갈 곳이 분명하기 때문에 죽음을 이민 가는 기분으로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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