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4월의 나라 꽃 무궁화
도민칼럼-4월의 나라 꽃 무궁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4.10 15:1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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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남강문학협회장
김기원/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남강문학협회장-4월의 나라 꽃 무궁화

나라마다 상징하는 꽃이 있듯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꽃은 무궁화이다. 그 무궁화 꽃을 오늘까지 나라꽃으로 선택되기까지 오래도록 지키고 가꾸었던 국민들 마음속에 희로애락의 깊은 사연들이 남아 전하기 마련이다.

올해 3·1 독립혁명 100주년을 맞아 선열들이 남긴 업적을 소리 높여 외쳐 보았지만 말이 없었다. 감격의 4월을 맞으면 묻어진 무궁화 꽃나무 사연 때문에 필자는 가슴 설레는 사건을 잊을 수가 없어 4월의 마음고생이 무쇠솥 누렁지로 일깨어 일어난다.

어릴 적 일제 치하에 발생한 해묵은 사건의 추억이다. 4월 어느 날 부친은 아침 <조(朝), 나라 방(邦)> 조방(朝邦)꽃나무란 묘목을 김법린 선생이 주신다고 대문 안뜰에 심어 몇 해를 정성스러워 가꾸어 몸집이 불었던 어느 5월부터 조방꽃나무가 꽃 피우기를 시작하여 서리의 밤을 슬쩍 넘길 무렵까지 꽃을 피웠다. 꽃 구경꾼이 각처에서 모인다. 그때마다 달콤한 배추뿌리에 된장 맛을 풍기는 부친은 아침나라 조방꽃나무 설명에 입술 침을 말린다.

그런데 어느 날 경찰서 형사와 긴 칼 찬 일경이 찾아와 부친을 찾을 때 필자는 어머님 치맛자락을 잡고 공포에 시달려 벌벌 떨고 있었다. 논갈이 갔던 부친이 돌아와서 여유로이 일경을 맞았다.

찾아온 일경이 한마디 한다.“야은선생, 이 꽃나무 때문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모여 든다고 신고가 왔소이다. 이 나무 이름이 무엇이요” 아침 햇빛을 좋아하는 조방꽃나무라고 소개한다. “조선 사람이 좋아하는 근화(槿花)가 아니요” 부친은 정중히 아니라 답했다. 그러자 일경은 “이 나무에 꽃이 못 피도록 송두리채 없애시오”라며 빨간 경고장을 붙이고 사라졌다.

뒤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법린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하였고 당시는 부산 동래 범어사 금정학원장으로, 조선어학회사건에 관계되어 옥고를 치렀던 휘하에 비밀단원으로 뒤늦게 알러지게 친목하였던 부친은 어느 날 일본형사 2명에 의해 경찰서로 잡아갔다.

할머니는 우리 집안이 쑥대밭이 될까봐 일본이 가장 싫어하는 무궁화 꽃나무를 머슴을 시켜 나무 둥치를 조금 남기고 잘라 버렸다.

부친은 15일 만에 풀려나왔다. 그런데 열 손가락마다 손톱 밑에 상처가 심하게 생겼고 왼쪽 작은 손톱은 오랫동안 앓았다가 결국 손톱을 잃게 되었다.

뒷날 알게 된 내용으로는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자백강요 방법으로 바늘 침으로 손톱 밑을 찔렸던 흔적임을 할머니에게 들었다. 손가락을 앓고 있었던 어느날 밤 할머님은 “이 놈아 눈알이 초롱초롱한 저 아이들까지 손톱 발톱 밑에 바늘 상처를 낼 작정인가?”라며 부친를 붙잡고 몇일을 두고 호소를 했다.

부친이 할머님 앞에 가족 사랑을 약속하였던 4월이 생각난다. 대문 안뜰에 심은 나무는 조방꽃나무가 아니라 무궁화(槿花) 꽃나무였다. 일경 형사의 눈을 속이고자 식물사전에 없는 <조방꽃나무>로 이름 지었던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추억으로 남는다.

또한 잘라진 조방나무 뿌리가 튼튼하여 매년 새싹을 내어 삶을 확인하였지만 꽃을 피우지 못하였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 맞아 1946년 4월부터 무궁화로 제 이름을 도로 찾았고 5월에 꽃도 해마다 만발했다.

필자가 아홉 살이 되던 4월 어느 날, 처음 진주 땅을 밞아 오늘에 살고 있다. 부친과 다솔사 주지 간에 교류한 흔적과 조선어학회사건의 근거지로 뒷날 알게 된다.

한 때 젊은 피가 끓었던 나라 사랑 무궁화꽃 정신을 비록 계승하지는 못하였으나 잊을 수가 없는 추억으로 밝힌다. 그리고 일본 말, 일본 옷, 일본 도구 사용에 엄격한 통제에 부족함보다 부친의 나라 정신을 명예스러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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