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대한민국 국호 제정 공로 신석우
진주성-대한민국 국호 제정 공로 신석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4.10 15:1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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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대한민국 국호 제정 공로 신석우

신석우(申錫雨)(1895~1953)선생은 대한민국 국호를 제정하는 일에 결정적(決定的) 역할을 했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회의록 문서에 그대로 적시되어 전해 온다.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과 신석우의 누이 신석호와 혼인했고 먼저 중국으로 들어가 이범석을 불러 무관학교에 입학시켰다.

부호이며 부친인 신태휴의 권유에 따라 일본 유학을 떠나 와세다 대학 전공과를 졸업하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아등의 소식>을 발간해 배포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제 1차 회의에 참석하여 교통총장이 되고 이시영 선생이 임시정부에 참여토록 주선했다.

대한민국 국호제정 관계는 의정원 문서(국회도서관)19면~43면에 회의록이 남아 있어 확실하다.

국호 제정의 안건이 논의 될 때 여운형 선생이 대한은 망한 나라 이름이니 적당하지 않다고 말했으나 신석우 선생이 대한에서 망했으니 대한에서 흥해 보자고 설득시킴으로서 국호가 결정되었고 이영근 선생 등이 표결로 찬성하면서 그대로 확정됐다.

국무원 구성과 임시 헌장을 제정하여 남녀평등권 등의 기초를 세웠다.

임시의정원 3차 회의에서 경기도의원 자격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23년 말경 귀국한 선생은 1924년 1월 서울에서 김성수 송진우 안재홍 조만식 등과 연정회를 조직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924년 9월 경영난을 겪는 조선일보를 인수해 이상재 선생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전 재산을 투자했으나 처음에는 상무이사가 되고 부사장을 거쳐 사장(1928~1932년)이 되어 처음으로 6면제를 확립해 민족언론의 창달을 위해 봉사했다.

각 진영이 참여했으나 중도에 정우회가 뛰어들어 결국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927년 2월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신간회가 조직되어 약 4년간 4만 명의 회원을 가진 항일단체로 성장함은 신석우의 공적이 들었다.

1945년 광복 후 중국대사로 나갔다가 귀국했으나 국내·외로 다니며 고생해 몸이 약해 져 59세 때 부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1995년 8월 15일 필자가 도우미 역할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2005년 11월 11일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 3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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