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뒷모습이 아름다운 여인, 협롱채춘(挾籠採春)
칼럼-뒷모습이 아름다운 여인, 협롱채춘(挾籠採春)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4.18 16:1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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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식/경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교수

박성식/경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교수-뒷모습이 아름다운 여인, 협롱채춘


자신을 드러내려 노력하지 않아도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몇 마디의 말로도 그 진가가 느껴지는 귀한 사람. 그런 사람을 주인공이라 여긴다. 주인공은 멋지고 아름답다. 매력적이어서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타고난 미색(美色)이 아니어도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짜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림에서도 주인공은 있기 마련이다. 정겨움으로 시선을 머물게 하는 그림이 있다. 소재도 소박하고 색채가 화려하진 않지만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그림이 있다. 바로 윤용(尹熔)의 협롱채춘(挾籠採春)이다.

윤용, 협롱채춘(挾籠採春), 27.6*21.2, 간송미술관소장
윤용, 협롱채춘, 27.6*21.2, 간송미술관소장

 

청고(靑皐) 윤용(1708-1740)은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며, 국보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손자이다. 아버지 윤덕희도 유명한 화가였다. 다산 정약용과는 고종 사촌지간이었다. 33세의 젊은 날에 죽음을 맞이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지만, 독특한 화풍(畵風)의 새싹 돋는 봄날, 농가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협롱채춘이 대표적으로 전해진다.

노을 진 빈 들녘을 바라보고 있으면 밀레의 만종이 그려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단순한 필치지만 진한 감동으로 워낙 강렬하게 다가왔기에 시골길을 걷다가 밭고랑 풀을 매고 있는 어느 아낙의 뒷모습만 보아도 나는 협롱채춘도가 선뜻 눈앞에 그려진다. 오랫동안 의식을 지배하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의도나 대상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선 얼굴 표정이 드러난 앞모습을 그리겠지만, 화가 윤용은 파격적으로 한 여인의 뒷모습을 통하여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했다.

바구니를 옆에 끼고 봄을 캐는 아낙의 모습을 그린 협롱채춘은 배경을 여백으로 과감하게 생략하여 뒤돌아선 여인의 뒷모습에서 수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배경은 단지 짚신 발 주변에 봄나물이 전부이지만 오히려 가득 채워진 배경보다도 더 큰 공간감을 주고 있다.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화면에 나타난 여백은 여성의 당당함으로 맞닿아 있다. 대바구니를 옆구리에 바짝 당겨있는 모습과 호미를 힘 있게 꺾어 잡은 손이 무척이나 당당하다. 풀을 잘 먹인 무명 머릿수건에 제법 야무지게 매어진 매듭이 당당하다. 말아 올린 저고리 소매와 허리춤에 찔러 넣은 치맛자락이 당당하다. 무릎까지 걷어 올린 속바지 아래로 튼실한 종아리가 당당하다.

가슴을 내밀고 꼿꼿하게 허리를 펴 힘을 주어 서 있는 여인의 다리가 당당하다. 몸은 그대로 두고 고개를 돌려서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저 의태함이 당당하다. 당당한 여성의 아름다움에 홀려 그림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면서 갑자기 그 여인이 궁금해져 버렸다. 작은 체구의 저 당당한 여인네가 보고 싶어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더니 아... 그도 여인인 것을. 앳된 얼굴 볼살이 살짝 보인다. 이목구비(耳目口鼻)는 전혀 볼 수 없지만 먼 곳을 응시하는 여인의 심정이 보인다.

“雨苗風葉綠董董, 纖手靑絲出漢宮, 滿眼蒼生總如此, 忍看塗抹畵圖中. 비 젖은 싹 바람맞은 잎 초록이 무성한데, 고운 손 검푸른 머리 한궁에서 나온다. 눈앞 가득 만물이 모두 이럴진대, 차마 그림 속에서 칠하고 바른 것으로만 보겠는가.“ 원나라 문인 소관(蕭貫)의 글을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인용한 협롱채춘의 시제를 보면, 아마 신선한 봄의 흥취 앞에 선 아리따운 저 젊은 여인을, 그림이라는 묵(墨) 장난 만으로만 원하지 않았음은 누구나가 느끼는 정서인가 보다. 오늘날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핸드폰을 하며 당당하게 걸어가는 도심 속 여성의 모습이 저 시대 저 여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 저 여인의 대바구니에는 당당한 봄이 가득 채워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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