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쉘’의 창업자 마커스 사무엘
칼럼-‘쉘’의 창업자 마커스 사무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4.22 15:52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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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쉘’의 창업자 마커스 사무엘

동유럽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해 와서 어려운 생활을 하던 유대인 일가가 있었다. 양친은 손수레에 잡화를 싣고 다니면서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 집에는 열한 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특히 열 번째 아들은 머리가 좋고 활력이 넘치는 아이였지만 학교 수업방식에 적응하지 못해 늘 성적이 떨어졌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다. 유대인들은 한 시기를 매듭지을 때 반드시 선물을 하는 습관이 있다. 아버지의 축하 선물은 다름 아닌 아시아로 가는 배의 3등 선실표 편도 한 장이었다. 돌아오는 표는 없고 목적지까지 가기만 하는 표였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금요일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편지를 쓰라는 것과 아버지 자신도 나이를 먹었고, 또 열 명의 형제자매가 있기 때문에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여행 중에 생각해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18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혼자 배를 타고 인도, 태국, 싱가포르를 거쳐서 아시아의 끝으로 향했다. 도중에 내리지 않고 종착점인 일본 요코하마까지 갔다. 그때가 1871년이었다. 그의 재산은 주머니에 있는 5파운드가 전부였다. 5파운드는 오늘날로 계산하면 10만 원 정도 되는 돈이다. 일본에 아는 사람도, 기거할 집도 없었다. 당시에 일본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은 요코하마와 도쿄 등지에 수백 명에 불과했다. 그는 ‘쇼난’이라는 해안에 도착해 빈 판잣집에 들어가서 처음 며칠 동안 지냈다. 거기에서 그는 이상한 것을 하나 보았다. 매일 일본 어부들이 와서 바닷가의 갯벌과 모래에서 조개를 캐고 있는 것이었다. 직접 손에 쥐어보니까 굉장히 아름다운 조개였다. 그는 이런 조개를 가공하면 단추라든가 담배 케이스 등 장식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도 열심히 조개를 줍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조개껍질을 주워 단추와 커프스, 장난감을 만들었다. 그리고 조개껍질 안쪽에 옻칠을 해서 문이나 책상을 장식할 수 있도록 세공품을 만들어 이것들을 영국으로 보냈다. 아버지는 이것을 손수레에 싣고 다니며 팔았는데 잘 팔렸다. 일본에서 아들이 보내온 물건들이 인기를 끌자 아버지는 수입품을 파는 작은 가게를 열었는데 금방 전문점으로 발전했다. 아들은 일본에서 나전칠기 화장함을 비롯한 나전칠기 제품을 전문으로 수출하고 아버지는 이를 도매로 팔았다. 런던에서는 아버지의 사업이 날로 번성하고, 일본에서는 아들 사업이 번창했다. 이 청년이 ‘마커스 사무엘’이다.

1876년 사무엘은 요코하마에 사무엘 상회를 설립했다. 그 무렵 사업가들 사이에서 가장 큰 화제는 석유였다. 때마침 내연기관이 등장했고, 석유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록펠러가 석유왕이 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즈음 러시아도 국내에서 유전을 개발했다. 그러나 일본이나 중국은 목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때 마커스는 경유와 등유를 중국과 일본에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와 거래를 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일본까지 석유를 운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2갤런 깡통으로 운반했는데 운반하다 보면 선박이 더러워져서 운반 후에 배를 청소하고 씻어내는 일이 큰 문제였다. 또 화재위험도 커서 선박회사들이 꺼렸다. 마커스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배 전체에 석유를 넣는 이른바 유조선을 고안하여 세계 최초의 유조선 선주가 되었는데 이 때 마커스는 인도네시아가 소규모 유전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도네시아 유전 개발에 투자하여 성공했다. 유조선마다 일본에서 캐냈던 가리비 조개 모양을 한 ‘뮤렉스’를 상표로 붙였다. 이 조개 마크를 단 석유회사가 바로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쉘(Shell) 석유회사다. 그는 세계 석유 시장을 석권해 ‘석유의 나폴레옹’, ‘유럽의 록펠러’라는 닉네임을 얻는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다. “나는 가난한 유대인 소년으로 일본의 해안에서 혼자 조개를 줍던 과거를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자수성가의 모델이었기에 한 번 새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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