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꿈인가 생시인가
아침을 열며-꿈인가 생시인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4.30 15:1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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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강영/소설가-꿈인가 생시인가

큰 비가 왔나. 비는 그쳤지만 강물이 둑을 곧 넘칠 것처럼 불어난다. 어린날 이런 날엔 동네 사람들이 물구경을 가곤했는데. 장마에 갇혀 있다 잠시 비가 그치는 그 틈에 강둑으로 몰려가 불어난 물에 놀라며 가까스로 강물이 둑을 범람해 논밭을 삼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하며 서로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세상에, 내 딸이 떠내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놀랄 새도 없이 딸을 건지기 위해 손을 뻗었다. 조금만 손을 더 뻗으면 딸을 잡을 수가 있겠는데 한 뼘의 사이를 두고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조금씩 멀어지는 게 아닌가!

이를 어쩌나! 이를 어쩌나 말이다. 마음은 안타깝다 못해 환장하겠다. 웬걸, 마음과는 달이 딸은 점점 강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강물은 누런 황토색으로 넘실넘실 무섭게 굽이친다. 강물이 이렇게 불었는데 왜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가. 왜 동네 사람들은 물구경을 오지 않는가. 누군가 있으면 긴 간짓대라도 달라고 하면 딸을 살릴 수 있을 것인데. 왜 아무도 없지? 딸은 이제 강의 저편 강가로 밀려가는 중이다. 딸아, 딸아! 나는 왜 이렇게 몸이 말을 안 듣지?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를 수도 없지? 딸은 이미 강 저편 기슭에 있는 풀숲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떠내려가는 중이다.

뭐야! 저녁에 잠들기 전에 딸이 배가 아프다고 했지 않나? 나는 순간적으로 잠을 깨고 벌떡 일어나 옆에 누워있는 딸의 이마를 짚었다. 싸늘했다. 손발 모두 싸늘하다. "딸아 일어나라, 일어나서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서 토해 빨리빨리!" 딸은 서둘어 일어나 비틀거리면서도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대고 엄마가 하라는 대로 토했다. "한번 더 손가락을 넣어. 아주 깊숙히 넣어. 또 토해, 응?" 딸은 또 엄마 말대로 했다. 딸은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화장실을 나오며 깊은 숨을 쉬었다. 딸을 비스듬히 누이고 미지근한 물을 조금씩 마시게 했다. 그리고 딸은 살아났다.

그 일이 있은지 거의 십 년이 넘었지만 딸과 나는 그때의 이야기를 기회있을 때마다 한다. “엄마, 그때 생각하면 진짜 아찔해, 그치? 나 엄마가 자는 동안 숨을 못쉬었거든. 정말로 명치가 꽉 막혀가지고 갑갑한데 숨을 못 쉬겠는 거야. 엄마가 조금만 늦게 깼어도 나 숨이 막혀 죽었을 거야” 딸이 그렇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순간 꿈을 깨면서 네가 나 잠들기 전에 배가 하프다고 한 게 기억이 나면서 이건 꿈이 아니다! 하는 걸 알아차린 거지. 나도 그때 생각하면 신기하고 놀라워. 물론 엄청 다행스럽고 나 자신이 조금 대견해”라고 말했다.

그때의 그 강물은 꿈인가 생시인가. 나는 아직도 거기에 대해 확언을 못하겠다. 꿈이라고 하기엔 무섭도록 누우렇게 넘실거리던 큰 강물이 너무도 또렷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냥 단순히 자면서 일어나는 뇌의 작용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구체적으로 나의 현실을 도와주었지 않은가. 나의 딸을 살려준 꿈이지 않은가. 도대체 누가 나를 도와준 거지? 하느님? 조상님? 부처님? 세 분 다?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잘난 체(?)하는 걸 용서해준다면 이 말만은 확언할 수 있다. 잠들기 직전의 딸의 상황을 늦게나마 상기한 나의 정신이 딸을 살렸다.

딸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련스럽게 자던 잠을 잤더라면 딸은 급체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입에 담기도 생각하기도 끔직하지만 만약, 만약에 그런 끔직한 일을 당했으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남은 아들이 하나 있지만 나를 용서할 핑계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아들에게도 소흘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겠지? 남편은 남편대로 무슨 잠을 그렇게 미련스럽게 퍼질러 잤느냐며 두고두고 나를 들들 볶았겠지. 딸이라면 꺼뻑 죽는 사람이니까. 결국 그 꿈이 아니었더라면 줄초상 났겠지. 아무튼 사람은 꿈을 꾸고 꿈을 가져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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