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부통령 이시영·함태영 항일공적
진주성-부통령 이시영·함태영 항일공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5.01 15:5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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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부통령 이시영·함태영 항일공적


광복 후 대한민국이 30년 만에 재건되자 초대 부통령에 취임한 분이 이시영(李始榮) 선생이다. 이시영(1869~1953년) 선생은 1891년 과거에 급제하고 회영과 함께 신민회에 가입하고 1910년 경술국치 후 전 재산을 매도하고 형제 등 가족 50여 명을 이끌고 남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해 유명한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의 기반을 세운 분이다. 1913년 북경에서 원세계 총통을 통해 동삼성의 한국 교포들을 원조케 했다.

3·1운동 때 북경에서 조완구, 이동녕, 조성환 등과 협의하여 국내외 항일세력과 연계시킨 활동을 했다.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 법무 총장. 재무 총장이 되었고 1942년에는 임정 재무부장이 되었다.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전할 때 까지 활동했다. 1945년 귀국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이 되었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부통령 재임 중 1949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됐다.

김성수(金性洙) 선생은 전북 고창군 부안면 출신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 대정과를 졸업(1917년)하고 귀국해 중앙학교 교장이 되고 경성방직(주)을 설립하고 취채역에 취임했다.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해 물산장려운동을 제창하고 보성학교를 인수하기도 했다. 광복 후 1951년 5월 2대 부통령에 취임했으며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나 1980년 이후부터 친일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제 3대 부통령은 함태영(咸台永) 선생이다. 함태영(1872~1964년) 선생은 호가 송암(松菴)이며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이다. 법관양성소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한성재판소 검사로 재직 중 1898년 독립협회 사건 관련자 이상재 선생 등 17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여 즉시 파면됐다.

1919년 2월 서울 지역 3·1운동 시위에 처음부터 주도한 기독교측 대표였으나 민족대표가 피체될 경우 그 가족들을 보호할 유일한 분으로 인정되어 민족대표 33인에 들지 않았다.

2월 28일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800여 장을 받아 평양기독교회와 김창준 등에게 보내 북한 일대에서 시위가 전개토록 했다.

그러나 1919년 3월 일경에 피체되어 엄중한 조사와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19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 및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으로 3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1949년 제 2대 심계원장에 취임했다. 한국신학대학 학장(총장)이 되었고 1952년 제 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 까지 재임하면서 큰 공적을 쌓았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자제 함병춘은 주미대사로 재임 중 미국 언론에서 장차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동남아에서 일부 세력에 의해 폭탄사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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