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시선-이쪽과 저쪽(5) ‘인재’
아침을 열며-시선-이쪽과 저쪽(5) ‘인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5.02 14:3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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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현 베이징대 外籍敎師
이수정/창원대 교수·현 베이징대 外籍敎師-시선-이쪽과 저쪽(5) ‘인재’

아직 그 연유를 들어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북경에서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내가 살고 있는 북경 서북부 하이뎬(海淀)구에는 대학들이 밀집돼 있다. 내가 지나가다 본 것만 해도 북경대, 청화대, 인민대, 북경과기대, 북경어언대, 북경외국어대, 북경입업대, 중국농업대, 북경사범대, 북경교통대, 북경이공대, 북경화공대, 중앙민족대, 중국과학원대, 북경항공항천대, 북경우전대, 북경연합대…등 하여간 많다. 이밖에도 더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세계적인 명문인 청화대와 북경대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웃하고 있다. 아니 청화대 블록의 한켠에 아예 북경대의 한 학부(물리학부)가 들어가 있다. 프랑스 파리의 초명문 소르본느대(파리4대+6대)와 고등사범학교(ENS)가, 그리고 미국의 초명문 하버드대와 MIT가 서로 이웃하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미국의 두 대학은 걸어서 한 20분 떨어져 있기는 하다.)

학교 도서관에서 작업을 하는 날은 운동 삼아 교정을 한 바퀴 산책하기로 정해두고 있다. 북경대 교정은 산책하기가 정말 좋다. 이 대학을 상징하는 ‘이타후투’(一塔湖图: 이 대학의 상징적 명물인 박아탑, 미명호, 도서관; ‘一塌糊涂’[엉망진창, 뒤죽박죽]과 발음이 같음)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건물들이 중국 전통건축이라 보기도 좋고, 안쪽에는 상당한 규모의 공원도 조성되어 있어 고궁의 분위기를 방불케 한다. 내가 소속된 철학계(系)의 교수연구동은 마치 깊은 산사의 암자같기도 하다. 처음 방문했을 때 이 분위기가 너무너무 인상적이었다. 겨울과 봄을 보았으니 이제 여름과 가을이 기대된다.

오늘은 집에서 가까운 청화대로 오후 산책을 나갔다. 자금성을 능가하는 엄청난 넓이가 사람을 압도했다. 바둑판처럼 반듯반듯 널찍널찍하게 구획되어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했다. 우선 동서를 가로지르는 큰길만 걸어봤는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다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북경대 같은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약간은 실망이었다. 그러나 이 대학도 그 한쪽 켠엔 어김없이 중국 전통식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 못가 정자에 앉아 한동안 시간을 즐겼다. 서양식 ‘청화문’과 그 안쪽 ‘청화학당’을 비롯한 초창기의 근대식 건물들도 고풍스런 분위기가 있었다. 뭔가 MIT와 약간 비슷한 느낌. 같은 이공계 명문이니까? 아무튼 좋았다.

돌아오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갔다. 대도시 북경이 대학도시라는 이미지는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엄연한 사실이다. 지방에도 세계적인 명문대학들이 즐비하다. 홍콩을 빼고도 상해 복단대, 상해교통대, 절강대, 무한대, 남경대…부지기수다. 나는 이 대학들에 바글거리는 학생들이 두려웠다. 이 젊은이들이 지금껏 가난에 절었던 중국을 G2로까지 끌어올렸고 앞으로도 무섭게 전진할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청화대를 거닐면서는 어디선가 젊은 후진타오와 시진핑이 지나갈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학문의 연구와 인재의 양성은 대학의 본질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대학은 어떠한가. 이 본질이 온전히 구현되고 있는가? 교수들과 학생들의 표정엔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교수들은 연구와 교육의 의욕을 잃고 학생들은 학점에만 매달리고 그나마 취업걱정으로 4년을 움츠려 지낸다. 교수들 위에 군림하는 직원들과 연구재단과 교육부 관료, 그들은 더 이상 학자요 교육자인 교수를 존경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이젠 학생들도 교육소비자로 자임한다. 교수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자조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뭔가 방향설정이 잘못돼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각해야 한다. 대학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어떤’ 인재를 길러낼 것인가, 깊이 반성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어떻게’ 그 ‘졸업 후’를 보장할지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국가가, 정부가, 당이, 정치인이, 관료가 해야 할 일이다. 그건 교수의 몫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방향에 대해 치열한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인다.

청화대를 산책하다가 한국어가 들렸다. 저 유학생들은 졸업 후 어디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북경대에만도 400명이 넘는 한국학생이 있다고 들었다. 예전엔 1000명도 넘었다고 한다. 청화대엔 또 얼마나 될까. 졸업한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국가를 위해 봉사하며 개인적인 행복을 누리며 보람을 느끼고 있을까? 내가 아는 한 우수한 북경대 박사생은 “졸업하면 여기서 취직을 하고 싶다”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우수해서 너무나 아까운 인재다. 그들이 조국이 아닌 중국을 위해 일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죽 쒀서 개주는 꼴’이다. 나는 여러 기회에 거듭 강조했지만 한국의 최대 강점은 각 분야에 포진한 우수한 인재다. 그들을 제자리에 앉히지 못한다면, 한국에는 미래가 없다. 세금이 남아돈다면 국가전략으로 연구소라도 만들어라. 거기에 인재들을 채용하고 일거리를 줘라. 바로 거기에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한국의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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