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대통령 후보 신익희 항일공적
진주성-대통령 후보 신익희 항일공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5.08 17:3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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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대통령 후보 신익희 항일공적

대통령이 되기 위해 후보로 出馬(출마)했다가 낙선한 이들 5명이 일제강점기에 항일투쟁을 전개한 놀라운 공적이 있다.

신익희(申翼熙)선생. 조병옥(趙炳玉)박사. 김준연(金俊淵)선생. 전진한(錢鎭漢)선생. 조봉암(曺奉岩)선생 등 5명이다.

신익희(1892~1956년)선생의 호는 해공(海公)이고 경기도 광주군 출신으로 부친은 평산 신씨 判書(판서) 신단이다. 부친의 권유에 따라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 대학 대정과를 졸업(1917년)하고 귀국하자 곧 중동학교 교원. 보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 학생들에게 애국, 애족, 애향 정신을 훈육하고 가르치다가 3·1운동에 동참케 하고 山寺(산사)로 피신했다가 체포직전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 임시정부를 위해 헌법을 기초할 때 큰 공을 세우고 초대 내무부 차관이 되었고 내무총장. 법무총장을 거쳐 문교부장. 외무부장을 담당하였고 국무원 비서실장을 거쳐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1940년 이후에는 중국 혁명군과 합작하여 군사행동을 추진했다.

1945년 광복이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이 되고 국민대학 학장. 자유신문사 사장이 되었다.

경기도 광주군에서 무소속으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민주국민당 위원장. 대한국민당 대표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당선될 수 있다는 여론이 높았으나 전북 전주로 유세차 가다가 열차 안에서 갑자기 서거하고 말았다.

185만 표라는 놀라운 추모표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1962년 당시 정부는 항일독립운동을 기리고 대한민국 건국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했다.

신익희 선생의 묘소는 서울 수유동에 안장되었고 2012년에 등록 문화재520호가 되었다.

장녀 신정완(申貞婉)도 중국으로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1943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국회)에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장남 신하균(申河均)은 부친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를 위해 공을 세우고 1990년 12월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부친 신익희 선생의 묘소에서 약간 북쪽에 보면 신하균 선생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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