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시선-이쪽과 저쪽(6) ‘늙음’을 대하는 태도
아침을 열며-시선-이쪽과 저쪽(6) ‘늙음’을 대하는 태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5.13 15:0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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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현 베이징대 外籍敎師
이수정/창원대 교수·현 베이징대 外籍敎師-시선-이쪽과 저쪽(6) ‘늙음’을 대하는 태도

똑같은 뉴스를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PC화면으로 보지만, 그 장소가 외국이면 느낌이 조금 달라진다.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현지와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북경에서 PC로 한국뉴스를 살펴보다가 “노인 기준 65세→70세로” “생산인구 줄어들어 경제에 충격. 복지부 장관 ‘사회적 논의 시작을’.”이라는 제목에 눈길이 갔다. 기사는 “저출산·고령화가 예상보다 더 급격히 진행되면서 노인 연령 기준을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로 이어지고 있었다.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지만 나와는 영원히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65라는 이 숫자가 엄연한 나의 현실이 되었기에 읽어보았다. 숫자는 사실이니 부인할 수 없지만, 노인이라는 이 단어는 나에게 너무나 낯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노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불편한 단어를 공식적으로 면제시켜준다면 그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노인이 아니라고 아무리 우겨도, 염색을 하지 않는 한, 머리를 뒤덮은 백발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북경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객차 안이 붐볐다. 나는 당연한 듯이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누가 툭 치길래 돌아보니 20대로 보이는 한 아가씨가 “닌 쭈오(您坐)”[앉으세요] 하며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북경에 와서 한 달 동안 벌써 3번째다. 아마도 이 백발 때문일 것이다. “난 괜찮은데…” 사양했지만 아가씨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벌써 문앞으로 가버렸다. ‘고맙습니다’ 하고 앉았지만 엉덩이가 영 편하지가 않다.

얼마 전에는 주말에 북경의 명소인 ‘원명원’에 가보았다. 얇은 지갑이 좀 신경쓰였지만 매표구에 줄을 섰는데 아직 말이 서툴다보니 눈치를 챘는지 여권을 보자고 했다. 보여주니 ‘외국인은 무료’라며 그냥 들여보내주었다. 뭔가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걷다보니 그 안에 별도 입장권을 사야 하는 특별한 구역이 있었다. 그냥 대충 바깥에서 보고 지나가려 했는데 그 입구에 장황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보니, 그중에 ‘60세 이상 노인 무료’라는 게 눈에 띄었다. 그렇다면…하고 입장을 시도했다. 역시 백발을 보더니 아무 제지 없이 들여보내주었다. 두 번이나 횡재를 한 것이다. 그 다음 주는 ‘원명원’보다 더 유명한 명소라는 ‘이화원’에도 가보았다. 좀 유심히 살펴보니 거기도 ‘노인 무료’였다. 당당히 공짜입장을 하며 이 단어에 대한 평소의 그 불편함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분이 좀 묘했다. 입장료 몇천 원의 절약, 단순히 그런 건 아니었다. 여기가 중국 북경이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즐겨 읽었던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 생각났다. 거기에 [우아한 노경으로]라는 인상적인 장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노년의 의의를 아주 긍정적으로, 아주 멋지고 감동적인 언어로 강조했었다. 늙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려는 중국과 ‘애써 아닌 척’ 늙음을 감추려는 미국을 대조하며 은근히 중국의 전통을 자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어릴 적 접했던 중국문학 중국영화에 등장하는 노인의 이미지는 ‘멋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물론 그것과 같은 것일 수는 없겠지만, 이렇듯 중국에는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같은 한국 뉴스사이트의 ‘폐지 줍는 노인’ ‘버려진 노인’ 관련 기사와 묘하게 겹쳐졌다.
한국의 적지 않은 노인들이 존경-공경은커녕 ‘불편한’ ‘만족스럽지 못한’ 노경을 보내고 있고 그 중 적지 않은 노인들은 버려지기도 하고 고독사를 맞이하기도 한다. 독일과 일본엔 “끝이 좋으면 다 좋다”(Ende gut, alles gut.)(終り良ければ、すべて良し。)는 속담도 있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생의 끝자락이 불편하대서야 그건 좀, 아니 많이, 불쌍한 노릇이다. 노인의 경제적 빈곤을 다루는 기사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공자가 생각났다. 이곳 북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저 산동에서 태어나 이 주변을 주유했던 그다. {논어}에 보면 그는 “선생님의 소원을 듣고 싶습니다” 라는 제자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소자회지 붕우신지 노자안지”라고 대답했다. ‘어린 아이는 품어주고 벗들은 믿게 하고 늙은이는 편안케 하는 것’, 이게 공자의 철학적 지표였던 것이다. 어떤 이는 “뭐 이런 당연한 것을...”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는데, 천만에, 사실 이건 보통 소원이 아니다. 공자의 이 말을 거꾸로 뒤집어서 그가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을 우리는 살펴봐야 한다. 거기엔 ‘아이들이 품어지지 못하고 벗들이 서로 믿지 못하고 늙은이가 편안하지 못한’ 절박하고도 가슴 아픈 현실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것과 똑같은 그런 현실이. 懷-信-安[품는다-믿는다-편한다] 이 세 글자만 실현이 되어도 인간세상은 거의 천국이다. 특히 나는 ‘안’[편안함-평화를 포함]이라는 것을 나 자신의 철학적 가치로 강조하고 또 강조해왔다. 인간의 삶에서 ‘편안함’ 만큼 소중한 가치도 많지 않다. 사실 몸 편하고 마음 편하면 더 이상 무슨 행복을 더 바라겠는가. (특히 노년에.)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다면 어떤 부와 지위와 업적과 명성도 의미가 없다. 누가 이것을 저것과 바꾸고 좋아하겠는가. 어떤 재벌 어떤 권력자 어떤 유명인이 자신의 그 부와 지위와 명성을 위해 몸과 마음의 건강(편안함)을 기꺼이 버릴 수 있겠는가.

‘老’란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글자다. 어차피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늙음인 이상, 늙은이됨을 굳이 기피하지는 말자. 임어당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자랑스럽게 백발을 휘날릴 수 있는 그런 사회, (중국이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사회를 우리는 지향했으면 한다. 경로는 낡은 것도 아니고 고리타분한 것도 아니다. 모든 인간들이 끊임없이 노경을 향하고 있는 한, 그게 우리 인간의 존재구조인 한,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할 과제다. 다만 단순한 숫자만으로 공경을 받고자 해서는 안 된다. 공경에 합당한 ‘노인’의 이름값을 하는 것, 그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한 모임에서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열심히 살아온 한 노인을 만났다. 사업가인 그분은 중국에서 새 사업을 시작하려는 한 젊은이에게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중한 지혜를 들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분의 그 주름진 얼굴과 백발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런 게 과연 나만의 이상한 미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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