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의 항일
진주성-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의 항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5.15 15:17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의 항일

조병옥(趙炳玉)박사는 항일투사로 건국훈장이 추서된 한양 조씨 조인원(趙仁元)의 아들이다.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를 졸업하고 191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대학재학중 안창호 선생을 만나 흥사단에 가입하고 한족회 총무가 되었다. 미국 와이오밍 대학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고 콜롬비아대학에서 철학박사가 되어 귀국하게 된다.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만나게 되었는데 즉시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승낙하게 된다.

1925년 9월 김준연 백관수 등과 조선 事情(사정)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5년 11월에는 윤치오, 이상재 등과 함께 태평양문제연구회를 결성하게 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구심체가 되었다.

일제가 묵인한 항일단체인 신간회 중앙본부가 창립될 때 발기인. 중앙위원이 되었고 신간회 교육부장을 거쳐 경성지회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서울과 지방으로 다니며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청소년과 여성들의 인권 신장을 위하여 일을 전개하였고 강연회를 실시하였다.

1929년 12월 광주에서 항일시위가 전개되자 일제를 비판하고 광주학생을 지지하는 민중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준비하다 일경에 발각 피체되어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형이 언도되었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2년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이 되었고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2년간 예심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한민당에 들어가 경무부장이 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제 5대 내무부 장관이 되었고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0년 제 2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4년 5월 제 3대 민의원(국회의원)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대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민주당 소속으로 제 4대 대통령 후보가 되어 유세도중에 갑자기 미국으로 가서 육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받다가 서거하였다.

민주당은 신익희 선생을 잃고 또 조병옥 박사까지 잃게 되자 크게 실망하였고 음모론이 번지기도 했으며 이승만 박사를 당할 자 없다는 말이 널리 회자되기도 했다.

조병옥 박사의 묘소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 산 139-1에 소재하고 후손들은 전 국회의원 조윤형. 조순형 등 3남 2녀가 있었다.

조병옥 박사의 항일투쟁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