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배려와 관용은 어디에 있는가
시론-배려와 관용은 어디에 있는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5.19 15:4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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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
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배려와 관용은 어디에 있는가

갈색의 긴 머리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름다운 여성이, 붉은 색 망토를 두른 백마를 타고 가는 그림이 있다. 1898년 영국의 화가 존 콜리어의 걸작인 ‘레이디 고디바’다. 얼핏 보면 고급한 춘화를 연상하게 하는 선정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11세기 중엽 영국의 전설적인 귀부인 고디바에 관한 고결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디바는 당시 코벤트리 지역의 영주인 레오프릭 백작의 어린 아내였다. 칠십 노인인 백작은 전쟁 준비를 위해 농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매겼고, 열여섯 꽃다운 나이의 아내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금을 낮추어 달라고 간청했다.

매정하기 이를 데 없는 백작은 장난삼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농민 사랑이 진심이라면 그 사랑을 실천해 보여라. 만일 당신이 완전한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돌면, 그리고 농민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의를 지킨다면 세금 감면을 고려하겠다.” 그런데 고디바는 정말 그렇게 했다. 영주 부인의 소문을 들은 농민들은 감동하여 집집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려, 어린 숙녀의 고귀한 희생에 경의를 표했다. 이 전설적인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고디바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야기의 곁가지로 톰 브라운이라는 양복점 직원이 커튼 사이로 그녀를 몰래 훔쳐보다가 눈이 멀었다고 한다.

‘피핑 톰(peeping Tom, 훔쳐보는 톰)’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관음증의 상징어가 되었다. 결국 고디바는 세금 감면에 성공했고, 아내의 용기와 선행에 감화된 백작이 선정을 펴게 됐다는 후일담이 전한다. 오늘날에도 코벤트리 지역의 상징은 말을 탄 여인이고 그 모형의 동상도 서 있다. 고디바의 감동적인 일화는 지금까지 유럽 전역에서 그림, 조각, 문학작품, 장식품, 이벤트 행사 등에 널리 소재로 사용된다. 특히 1926년 벨기에의 한 초콜릿 회사가 자국의 문화적 전통에 이 일화를 결부하여, 고디바를 상품의 표제로 삼았다. 품격 있는 포장지와 우아한 문양의 조개껍질 디자인을 갖춘 고디바 초콜릿은 세계적인 명품이 되었다.

이 한편의 드라마 같은 담론 속에는 힘없고 연약한 백성들에 대한 따뜻하고 눈물겨운 배려, 그리고 관용의 정신이 담겨 있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배려 또한 그럴 터이다. 진정한 배려는 상대가 배려를 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성경에서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6:3)’ 하라고 가르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배려와 관용이 언젠가는 보응이 되어 자신이 위급할 때에 되돌아올 수 있다는 세상살이의 원리다. 바쁜 일상 속에서 앞만 바라보던 눈길을 멈추고 잠시 주변을 돌아보면, 이 쉽고도 어려운 일을 실천해야 할 대상이 너무도 많다.

이러한 대목과 관련하여 한국의 현실 정치를 한 번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혈세를 받으면서 나랏일을 맡은 정치 세력의 무리 가운데, 정말 배려와 관용의 덕망을 보이는 인물은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잘 보이지 않는다. 정치인에게는 서로 다른 사상이 있을 수 있고 그 방향성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공인으로서의 금도(襟度)가 있고 지도자로서 지켜야 할 면색(面色)이 있다. 내 편의 이득이 아니라 공공의 과제, 정권적 목표가 아니라 국가적 책임을 감당하려는 실질적 언사와 행동이 증발한 지 오래다. 앞으로도 이 모양이면 정부와 국회, 각 정당의 수장은 모두 후세의 사필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한국 정치에 저 멀고도 오랜 시간 속의 고디바 이야기를 겹쳐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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