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훈 주필의 신인물기행-진주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리영달 위원장
강남훈 주필의 신인물기행-진주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리영달 위원장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5.21 18:11
  •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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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혼, 진주정신을 후손과 시민에게 심어줄 것”
▲ 진주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리영달 위원장은 “진주역사관을 만들기 위해 첫발을 내디딘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1300여년의 진주 역사와 정신을 오롯이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소위원회 만들어 주요현안 협의해 나갈 것

1300여년 역사·정신 오롯이 담도록 노력
삼일만세의거 재현 등 많은 역사 복원 앞장
‘에나 진주사람’으로 평생 지역사랑에 헌신


경남 진주시를 얘기할 때 ‘천년고도(千年古都)’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 경남에서 제일 먼저 형성된 도시이자, 서부경남의 교통, 행정, 교육, 문화 등의 거점도시이기 때문이다. 진주시는 서부경남의 젖줄인 남강(南江)이 가로질러 흐르고, 1925년 경남의 도청소재지를 부산으로 옮기기 전 까지만 해도 경남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진주시민들의 뇌리 속에 항상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고도 진주에 왜 ‘역사관’이 없는 것일까?

진주 시민의 오랜 숙원을 풀 첫 단추가 꿰어졌다. 지난 13일 진주시가 진주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위원 13명에게 위촉장을 주면서 진주역사관 건립을 위한 그 첫발을 내 디뎠다. 위원장은 (사)진주문화사랑모임 명예이사장인 리영달 박사(86)가 맡았다. ‘에나 진주사람’으로 통하는 리 박사를 만난 것은 지난 17일 오후 진주시 진주대로 1040번길 <리치과>였다. 진주역사관 건립에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그가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진주역사관 건립 문제가 이번에 처음 제기된 것인가요?
▲아닙니다. 1999년 7월 제가 이사장을 맡고 있던 (사)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 진주역사 박물관을 추진했습니다. 진주역사 박물관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은 제가 맡고 당시 진주출신인 백승두 시장이 위원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추진과정에서 장소 선정문제 등의 이유로 많은 이견이 있었습니다. 결국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 흐지부지 됐습니까?
▲정영석 시장 때도 진주역사 박물관 문제가 거론됐습니다만, 예산도 많이 들고, 자료도 없고… 등의 이유로 제대로 추진이 되지 못했습니다. 정상적으로 추진됐으면 2014년이나 2015년에는 완공이 됐을 것입니다.

리영달 위원장이 복원한 진주 삼일만세의거 기념 걸인기생 횃불시위 재현 행사
리영달 위원장이 복원한 진주 삼일만세의거 기념 걸인기생 횃불시위 재현 행사

-이번에 또다시 진주역사관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지난 1월 30일 조규일 시장이 원로회의를 열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모두 일곱 분이 참석했는데, 이 때다 싶어 진주역사 박물관 추진 경위 등을 적은 메모를 조 시장께 전달했습니다. 진주의 역사와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시장께서 아마 이 메모를 보고 역사관 건립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으셨습니다.
▲저는 나이도 많고 해서…그런데 추진위원회를 발족하면서 위원으로 위촉된 분 등이 ‘리 박사가 시작했으니 위원장을 맡아라’고 얘기하는 바람에 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역사관과 역사박물관 등의 얘기가 나오는데 어느 쪽으로 추진할 예정인지요?
▲역사관은 단순히 자료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역사박물관으로 하자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진주역사의 흔적은 물론 학술대회, 역사에 대한 교육, 각종 이벤트, 외국도시와 자매결연을 통한 진주 역사를 세계에 알리는 일 등이 박물관으로 했을 때 보다 용이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예산문제가 뒤따르겠지만, 앞으로 심도 있는 토론이 있어야겠지요.

-혹시 장소 등의 얘기는 있었습니까?
▲망경동 일대, 옮길 예정인 청소년회관, 진주박물관을 옮겨서 추진하는 문제, 서장대 진주보건소 예정지 등등 여러 장소가 주변에서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아직 결정된 것은 없습니다. 앞으로 추진위원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논의할 생각입니다.

-그럼 어떤 내용들을 중심으로 하실 생각이신지요?

▲진주의 역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용은 충분합니다. (사)진주사랑모임에서 천년도시 진주역사 표지세우기를 한 곳만도 모두 14군데입니다. 진주객사, 진주향청, 진주동헌, 진주진영, 운주헌, 진주교방, 사직단, 진주종묘장 등등. 여기다 국립경상대학교 박물관, 경남과기대, 진주교육대 등에도 많은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직 합의를 본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진주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만 해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포함되도록 해야겠지요.

진주역사관 건립 문제에 대해 리 박사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1995년 6월 60여명의 지역인사와 함께 (사)진주문화사랑모임을 만들은 그는 사재를 털어 올곧은 ‘진주정신’과 ‘진주문화사랑’에 헌신해 왔다. 1999년에는 ‘진주팔경’을 제정했다. 제1경 진주성과 촉석루, 제2경 남강 의암(義庵), 제3경 뒤벼리, 제4경 새벼리, 제5경 망진산 봉수대, 제6경 비봉산의 봄, 제7경 월아산 해돋이, 제8경 진양호 노을 등이 그것이다. 또 1996년 진주 삼일만세의거 기념 걸인기생 횃불시위를 재현했으며, 진주대첩의 주역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 반환운동을 전개, 2006년 7월 국내로 돌아오게 만들어 해외유출 문화재 반환의 이정표를 세우기도 했다. 망진산 봉수대 복원과 통일기원 망진산 봉수제를 올린 것(1995년 8월)을 비롯, 진주시민 민족운동 요람인 금성초등학교 보존운동, 배영초등학교 터 역사문화관 건립추진, 진주형평운동의 주역인 신현수 선생 송공비(頌功碑)이전, 진주소년운동 발상지 표지석 설치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진주 역사의 흔적들이 그의 손에 의해 복원되기도 했다.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지난 1996년 8월 16일 열린 망진산 봉수대 준공식
지난 1996년 8월 16일 열린 망진산 봉수대 준공식

-진주역사관에는 진주의 뿌리가 총 망라 되어야 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저 어릴 때 불렸던 민요가 있습니다. ‘경상남도 진주는 인심이 좋아서 노란 돈 한 닢을 가지고도 장가를 간다네…’ 등의 ‘소리’라든가, 문산의 줄싸움(줄다리기) 등은 굉장히 유명한데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에는 문산 줄싸움에 대한 자료가 있습니다만, 진주의 역사에 비해서 (후손들의)역사의식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걸인기생 독립만세 운동 등을 복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진주 역사의 복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사)진주문화사랑모임 회원들과 역사탐방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해설사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성안에 도시가 있던 곳은 진주밖에 없었는데, 한번 가보니 다 없어지고 잔디밭만 있더라.’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참, 우리가 힘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소장하고 있는 72년도 사진(눈 내린 안성동네)을 보면 진주 성안에는 네 개의 우물이 있었고(한개 발견), 도청 소재지 옛 건물도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이게 진주의 현실입니다.

-그럼 진주역사관에는 진주의 혼(魂)이 담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역사관(박물관)을 추진하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진주의 혼, 진주정신, 진주사랑을 후손들에게, 시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번 기회에 ‘진주학(學)’을 만들자는 얘기도 하십니다. 진주정신, 진주의 풍물, 진주인심, 진주의 나라사랑 등 종합적인 것을 담아서 학문적 체계를 세우자는 것이지요.

-진주역사관 건립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진주역사관(역사박물관)을 만들어야 되겠지요. 5~10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산도 애초에는 60억 정도 잡았는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있어야겠지요.

-앞으로 건립추진위원회를 어떻게 운영해 나갈 생각이신지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위원회 전체회의를 갖고,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는 소위원회를 만들어 구체적인 논의를 해 나갈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소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해 나가면, 신속하게 중지를 모을 수 있고, 현안이나 복잡한 문제에 대한 대처도 빠르게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박사님의 진주사랑 정신은 뼈 속까지 배여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진주에서 태어났고 진주에서 성장했습니다. 이 만큼 성장하게 된 것은 ‘진주 인심’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고무신 장사를 하시면서 저의 형제들을 키웠는데, 진주 인심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대학 마지막 등록금이 없어 고생할 때 주위에 계신 분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저의 등록금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자리를 잡으면 진주를 위해 헌신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진주의 인심이 옛날과 지금은 차이가 있지만 옛날 진주인심은 참으로 순수했습니다.

리영달 위원장이 소장하고 있는 1972년도 사진 ‘눈 내린 안성동네’
리영달 위원장이 소장하고 있는 1972년도 사진 ‘눈 내린 안성동네’

-위원장으로서의 각오 한마디 해 주시죠.
▲진주역사관을 만들기 위해 첫발을 내디딘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시장께서도 힘껏 노력하겠다고 했으니 진주시민들께서 기대하는 것만큼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1300여년의 진주 역사와 정신을 오롯이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진주역사관 건립을 저의 마지막 소명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인터뷰 내내 리영달 박사는 그의 별명처럼 ‘에나 진주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금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사범학교를 다니다 진주농고에 입학한 그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한 후 진주에서 치과의사의 길을 걸었다. 이때부터 그의 ‘진짜 진주사랑’이 이어졌다.

학창시절부터 축구 등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진주축구협회장을 5년 동안 맡아 진주 축구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사재를 털어 만들은 ‘리영달 축구상’은 올해로 30회째 시상을 하고 있다. 그는 문산 출신으로 진주고 축구선수였던 박종래 선수(현재 목사), 최진한 전 경남FC 감독 등에게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리 박사는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60~69년까지는 개천예술제 사진부장을 맡기도 했다. 1998년에는 진주사진협회를 만들었다. <나의 고향> 이라는 첫 사진집을 냈으며, 그가 찍은 투우(鬪牛)사진 등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작품이다.

팔순을 훌쩍 넘긴 요즘에도 하루 10명 안팎의 환자를 진료한 뒤 시간이 날 때마다 연꽃의 일생에 대한 사진을 찍기 위해 함양, 함안 등지를 손수 운전해 다닌다. “연잎은 자기가 감당할 무게를 안다”는 그는 “연의 일생을 통해 인생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고 말했다. 지금도 틈날 때 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그는 “3년 후 회고록을 낼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정리하고 있다”며 “치과의사, 사진작가, 시민운동가 등으로 살아가는 저에게 지금까지 불평 한마디 없이 함께 해준 아내에게 가장 감사할 뿐이다”고 강조했다. 사진/이용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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