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부석사(浮石寺) 건립의 일화
진주성-부석사(浮石寺) 건립의 일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5.30 16:0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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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부석사(浮石寺) 건립의 일화

의상(義湘 625-702 성은 김)대사가 당나라에 유학 때 병이 들어 양주성 어느 신도집에 요양하게 되었는데 그 집의 딸 선묘(善妙)라는 낭자가 의상에게 연정을 품게 되어 선묘낭자는 온갖 교태를 부려 의상을 유혹 구도의 일념에 가득찬 대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자 선묘낭자는 스님께 귀의하여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웠다.

의상은 완쾌후 화엄학의 정수를 체득하고 스승으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아 10년만에 귀국코자 양주성 선묘낭자 집에 들려 그동안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려 했으나 선묘낭자가 출타중 만나지 못하고 떠나오게 되었다.

의상대사가 귀국의 소식을 듣고 선묘낭자는 준비된 법의와 집기를 바구니에 담아 해안으로 나와 의상대사가 탄 배는 이미 떠났고 선묘낭자가 합장하고 “저의 참된 본심은 스님을 공양하는 일 못함이 저 배에까지 이르기를 바라옵니다”하고 기도를 하며 바다에 띄우니 갑자기 바람이 일어 대바구니함이 새털처럼 날아가 의상이 탄 배에 닿았다. “제 몸이 용으로 변하여 수천리 뱃길을 보호하겠나이다”라고 맹세하며 바다에 뛰어드니 바다의 신도 그녀의 원력에 감동 용이 되게하였다.

그 후 선묘낭자는 용이 되어 서해바다의 풍랑을 잠재워 의상의 귀국길을 보살폈고 부석사(676)를 창건할 때에도 종파를 달리하던 무리들이 모여 방해를 하자 큰 바윗돌로 변신하여 그들의 머리 위 허공을 맴돌며 혼비백산시켜 쫓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 바위가 된 선묘낭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부석사(浮石寺)라 이름하였고 무량수전 뒤편에는 선묘각이 있으며 그 당시 이적을 부렸던 바위가 부석바위라는 것이다.

그때 선묘낭자는 부석사를 영원토록 수호하기 위하여 석룡(石龍)으로 변해 무량수전 밑에서부터 절 마당 석등자리까지 몸을 묻었는데 지금도 그 석룡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고적한 절간의 밤늦은 시간에 들은 이 사랑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굉장히 애틋한 심사에 젖어들게 했다.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었다는 것은 후대에 신비화시킨 내용일터이고 이국의 수도승에게 마음을 빼앗긴 한 여인이 부모 형제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낯선 타국까지 쫓아왔을텐데 어쩐지 그녀가 부석사에서 보인 이적은 죽음의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500인의 기존 종파의 완강한 반대를 선묘낭자가 물리쳐 주었다는 것은 살신성인의 이적밖에 없지 않은가. 석룡이 되어 무량수전 아래 묻혔다는 설화. 사당에 모셔져 있는 점. 신묘정의 우물 가뭄 때 기도를 드린 감응 등 신앙을 암시 1300년 전 사랑을 위해 부석사에 찾아와 묻혔다는 마음 사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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