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칼럼-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건강칼럼-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5.30 17:1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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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훈/경상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강정훈/경상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우리 사회 전반에 웰빙(Well-being)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에 지친 현대인이 조직과 사회의 번영에서 눈을 돌려 자신의 삶의 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은 질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 인식으로 이어졌고, 이를 일컬어 ‘웰빙’에 대비되는 용어인 ‘웰다잉’(Well-dying)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단어들을 관념적으로만 대할 때는 웰다잉을 추구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살아있을 때 행복한 ‘웰빙’의 생활을 하다가 죽어갈 때 편안하고 의미 있는 ‘웰다잉’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국립암센터에서 건강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웰다잉의 대명사인 호스피스 서비스가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1.7%가 긍정적으로 답했고, 응답자의 58.5%는 추후 호스피스 서비스를 이용할 의사가 있다고 한 것이 그 방증이다. 하지만 정말로 죽음을 마주한 사람들에게도 호스피스가 웰다잉의 공간으로 느껴질까?

진료 현장에서 마주치는 많은 암 환자들은 대개 나이가 지긋하다. 이들 가운데는 젊은이들이 주문처럼 외치는 ‘웰빙’이란 단어조차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로 ‘나’보다는 ‘우리 가족과 사회’를 위해 열심히 살아오신 분들이 많다. 그들에게 삶의 행복은 가족과 사회에 먼저 자신의 의무를 충실하게 다한 뒤 나중에 찾아 쓰는 적금과 같은 개념인데, 어느 순간 죽음의 공포가 그들을 덮치게 된다. 성별, 나이를 가리지 않고 암이라는 불청객이 불쑥 찾아오는 것이다.

암 환자을 보는 의사로서 환자와 가족들에게 여러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일상의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매일 하는 일이라 해도, “이제는 항암제가 듣지 않아 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고,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라는 말은 항상 목구멍에서 한 바퀴 맴돌다가 나온다. 이런 이들에게 호스피스는 죽음을 연상시키는 불쾌한 단어이고, 그들은 자연스레 그런 말에 거부감을 갖게 된다. 우리나라 암 사망자 중 호스피스를 이용하는 비율이 13.8%로 대만 30%, 영국 95% 이용률에 비해 많이 낮고, 그 시기도 대부분 사망 1달 이내에 집중되는 것도, ‘웰다잉을 도와주는 호스피스’라는 막연한 관념이 나와 가족들에게 현실로 다가왔을 때의 괴리감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이런 순간들을 계속해서 마주하다 보니, 웰빙과 웰다잉은 반대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연속선상에 있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웰빙을 위해서는 건강하고, 가족간에 화목하고,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 웰다잉도 마찬가지다. 암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도 최소화돼야 한다. 문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들을 위해 호스피스 서비스가 존재한다. 호스피스는 다른 입원실에 비해 시설도 많이 다르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인력 구성에 있다. 대부분 의사와 간호사의 관리 하에 놓이는 일반 병동과 달리 호스피스는 여러 직종의 사람이 팀이 돼 활동한다. 의사와 간호사는 육체적 고통을 최소화하고, 사회복지사,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팀원들은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환자와 남아있는 가족들의 사회적인 아픔을 어루만져준다. 성직자는 환자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헤아리고 돌봐주는 등 호스피스는 전인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칼의 노래’의 저자인 소설가 김훈은 의학과 죽음의 관계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음을 박멸하는 것이 의학의 목표라면 의학은 저 소각로 백골 앞에서 백전백패할 것이다. 죽음과 싸우지 않고, 죽음을 인도하는 것이 의업의 길이며, 생로병사를 거스르지 않고 함께 흘러가는 길이 훨씬 더 어른다울 것이다.” 호스피스를 하는 의사로서, 나는 그의 주장에 깊이 공감한다. 흔히들 암으로 치료를 받다가 임종이 임박할 때 호스피스로 가서 죽음을 맞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호스피스는 죽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호스피스는 환자가 웰다잉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또 하나의 치유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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