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길(1)
칼럼-길(1)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6.03 15:1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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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길(1)

앞으로 3회에 걸쳐서 길에 대하여 역사적·개념적·사상적· 철학적·문화적·관념적이며 토목학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길’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였으며 그 어원은 무엇일까? 본디 길은 인류의 생존사와 함께 생성, 발전한 것이므로 ‘길’이라는 말도 우리 민족사와 함께 발생한 원초적 어휘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다. ‘길’이란 인간의 의식(衣食)과 주거(住居) 사이를 연결하는 공간적 선형이라 할 수 있다. 원시인들이 의식의 재료인 조수(鳥獸)·과실·어패(魚貝) 따위를 주거인 굴혈로 운반하기 위해 반복 통행하면서 생긴 발자취가 곧 길의 원초적 형태였다면, 그들의 생활에서 가장 많이 반복 통행한 곳은 식수원(食水源)과의 통로였을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주거와 일정한 식수원인 골짜기와의 연결선에서 길의 첫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요, 동시에 길의 어원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길은 인류사와 함께 생성, 발달해왔다 하였으나, 그것이 사료로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아프리카 알제리 영내의 사하라 사막에서 발견된 타시리 나젤 암벽화 중 ‘소의 시대’라고 분류된 서기전 45∼15세기에 소를 타고 여행하는 그림과 배의 그림이라 하니 길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있어 왔는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우리나라에서의 역사적 문헌에 의한 길은 ‘도로(道路)’ 또는 ‘도(道)’나 ‘노(路)’등 한자어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말의 ‘길’이라 하면 좀 더 자연스런 통로를 연상하는 데 비해 ‘도로’라 하면 이른바 인공으로 정비된 길을 연상한다. 우리 국어사전에도 도로는 ‘사람이나 차들이 편히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비교적 큰 길’ 따위로 주석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자에서 글자는 경(徑)·진(軫)·도(道)·노(路)로 구분하고 있다. ‘주례(周禮)’의 주석에 따르면 ‘경은 우마를 수용하고, 진은 대거(大車)를 수용하고, 도는 승거(乘車) 한 대 또는 두 대를 수용하고, 노는 세 대를 수용한다’고 하였다. 짐작컨대 경은 우리의 오솔길이나 소로 길에, 도는 그보다 좀 나은 길에, 노는 가장 큰 길에 해당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의 역로 이름을 ‘운중도(雲中道)’ 따위와 같이 모두 ‘도’로 썼는가 하면 조선 시대의 법전에는 ‘도성 내 도로’와 같이 ‘도로’라 하다가 ‘대로·중로·소로’와 같이 ‘노’를 쓰기도 하여 일정한 기준이 없었다.

삼국사에서 도로와 관련된 자료가 비교적 많은 나라는 신라이다. 신라는 서기전 37년경 이미 경주를 중심으로 6촌이 흩어져 있었는데, 이들로부터 추대된 혁거세왕은 6촌을 순회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농잠을 장려하였으며,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는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거서간 17년 조 및 21년 조의 기록으로 미루어 경주와 6촌 사이에 육로가 열려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세기 중엽에는 영로(嶺路)가 개척되어 156년(아달라왕 3)에는 계립영로(鷄立嶺路)를 개척하였고, 이듬해에는 왕이 장령진(長嶺鎭)을 순행하였으며, 158년에는 죽령(竹嶺)을 개척하였다고 했으니 국내 전역에 걸쳐 통로가 제법 정비되었을 것이다. 434년(눌지왕 22)에는 백성에게 우거지법(牛車之法)을 가르쳤다 하였으니 이것을 민간에 소달구지 사용을 장려한 것이라 해석한다면 부분적으로나마 꽤 큰 규격의 도로가 있지 않았나! 추측되기도 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487년(소지왕 9) 역참제(驛站制)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우역(郵驛)의 설치와 관도(官道)의 치수(治修) 기록이다. 584년(진평왕 6)에는 육상 교통을 담당하는 기관인 승부(乘府)가 설치되고, 678년(문무왕 18)에는 해상 수송을 담당하는 선부(船府)가 설치되는 등 교통 체계가 제법 확립된 것 같다.

고구려는 북방 계통과 중국 계통의 문화가 전파되는 경로로서의 지리적 조건 때문에 삼국 중 가장 먼저 개화한 나라로서 서울을 5부로 나누고, 지방도 전국을 5부로 나누었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는 국내성과 평양, 그리고 지금의 서울에 3경을 둠으로써 3경을 잇는 간선, 5부를 연결하는 준 간선 도로와 그리고 각 중심성과 그 관할 하에 있는 작은 성들과를 연결하는 지선으로 도로망이 조직되었으리라 짐작되나 그 구체적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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