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길(2)
칼럼-길(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6.10 15:1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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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길(2)

백제는 한강 유역과 금강 유역을 장악하고 전국을 남·북·동·서의 4부로 행정 구역을 편제하였다가 웅천으로 천도한 뒤에는 왕도와 전국을 각각 5부로 가르고, 왕도 5부는 5항(巷), 전국 5부는 10군(郡)으로 갈라 편제하였으므로 이들 행정 구역 상호 간에 연결된 도로망을 상상할 수 있으나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고려 시대에는 995년(성종 14)에 10도(道)를 제정, 설치하였고 1173년(명종 3)에는 7도와 5도가 있다고 하였다. 이 중 5도는 북계(北界)의 운중도·흥화도(興化道)와 동계의 명주도(溟州道)·삭방도(朔方道)·연해도(沿海道)가 그것인데, 이 중 연해도를 제외한 나머지 4도는 역도(驛道)의 이름과 중복되는 것으로 이때의 ‘도’는 길을 뜻하는 도와 행정 구역의 도를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시조에 읊어진 길에는 이황(李滉)과 같이 도의(道義)의 뜻으로 쓴 길은…「고인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을 못뵈/고인을 못 뵈와도 예던(행하던) 길 앞에 있네!/예던 길 앞에 있거니 아니 예고 어이리」라고 했으며, 장만(張晩)과 같이 실체의 길을 뜻한 것으로 쓴 길은…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구절양장(꼬불꼬불한 산길)이 물도곤 어려왜라/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만 하리라.」라고 했으며, 김동인(金東仁)의 단편 ‘배따라기’에는 주인공이 살아 있는 한 탐색이 계속되어야 하는 숙명의 길이 나타나 있다고 김용희(金鏞熙)는 분석하였다. 즉, 형수가 물에 빠져 죽은 데 대해 형에게 원망을 품고 떠나가는 아우의 육로는 구도자의 고행길이요, 형이 찾아 나서는 뱃길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속죄의 길로서… 여기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숙명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길은 예로부터 우리 생활과 밀접하므로 길을 소재로 한 글이 많다. 먼저 우리 격언이나 속담에 나타난 길의 예를 찾아보면, ‘길로 가라 하니까 뫼로 간다’, ‘길을 두고 뫼로 가랴’, ‘길 닦아 놓으니 용천배기 먼저 간다’, ‘시앗 싸움엔 길 아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 ‘길을 알면 앞서 갈 것이지’,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 등이 있다.

현대에서의 길의 정의는 ‘사람·자동차·비행기·배 등이 왕래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의 뜻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교통수단으로서의 길, 둘째는 방도(方道)를 나타내는 길, 셋째는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길이다. 교통수단으로서의 길은… 구상적 실체로서 본래는 단순히 보행을 위한 육상교통의 수단으로서의 길만을 가리켰다. 이런 뜻에서 길을 정의한다면, 사람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갈 수 있게 된, 거의 일정한 너비로 땅 위에 뻗은 공간적 선형(線形)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에서는 그 길의 양태나 규모에 따라서 ‘길’ 앞에 어떤 관형어를 붙여 의미를 구체화하여 사용한다. 이와 같은 보행을 위한 육상 통로는 교통기관이 발달함에 따라 개념이 확대되고 다양화되어 실체가 없는 관념적 통로까지를 일컫게 되었다. 방도(方途)라는 개념의 길은…‘무슨 길이 없을까?’,‘손쓸 길이 없다.’라고 할 때의 길은 교통수단의 길이 교통 이외의 수단으로까지 확대된 개념이다.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길은… 정신문화가 깨쳐지면서, 특히 동양 사람들에 의해서 철학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서양에서는 흔히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고 세상은 무대로, 사람은 배우로 관념하는 데 대해서, 동양에서는 인생을 곧잘 여행에 비유한다. 이때 세상은 여관으로, 사람은 나그네로, 인생살이는 길을 가는 것으로 관념하고 있다.

유교나 불교·도교 할 것 없이 동양 사상에서는 그 이념을 길[道]이라 하고,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심성이나 행위를 ‘도(道)’이니 ‘도덕(道德)’이니 하여 길로써 표현한다. 왕도정치(王道政治)니 공맹지도(孔孟之道)니 하는 말이나, ‘군자는 대로 행’이니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말라.’는 우리 속담의 길도 모두 도의(道義)의 상징으로 쓰인 것들이다. 이때의 길은 최초의 개념인 교통수단과는 동떨어진 것이지만, 사람들이 추상적인 ‘도’를 숭상한 데서 다시 실체로서의 길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왕도(王道)는 곧 치도(治道)’라 한 ‘예기(禮記)’의 표현이나 하천에 다리 놓는 일을 인생 제도(濟度)의 실천적 행위로 해석하는 불가(佛家)의 사고에서 그 구체적 사례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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