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부통령 후보 이범석의 항일공적
진주성-부통령 후보 이범석의 항일공적
  • 정혜연기자
  • 승인 2019.06.12 15:21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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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부통령 후보 이범석의 항일공적

이범석(李範奭) 장군은 청산리 전투의 주역으로 큰 공을 세운 분이다. 서울 용동에서 전주 이씨인 부친 이문하 농상공부 서기관. 이천 군수를 역임한 분과 연안 이씨의 슬하에 태어났다.

외삼촌은 신익희와 한성외국어학교 동창이며 개화 지식인이었고 여운형 선생을 통해 국제 정세와 항일투쟁사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친누이 이범호가 부호 아들인 신석우(申錫雨)와 혼인하자 각기 영향을 받아 일본 학생복을 입고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상해로 건너가 신규식, 신석우, 신채호 등을 만났다.

신석우 선생은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에서 대한민국 국호를 제정할 때 여러 의견을 물리치고 대한민국 국호를 완성시킨 분이다.

신석우. 신채호 등의 주선으로 운남강무학교 기병과를 32개월 만에 졸업하고 만주 통화현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었다.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을 만나 연성대장이 되었고 체코군인들로 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최정예 부대로 성장했다.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 신민단. 국민회군 등은 화룡현에 집결하고 매복조가 일군 기병대를 섬멸하고 어랑촌. 백운평. 천보산에서 승전하니 일본군 1200여명의 전사자와 2100여명의 부상자를 냄으로서 청산리 전투가 승전케 했으며 아군은 130여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로 大勝(대승)을 거두었다.

1940년 9월 27일 광복군이 창설되자 참모장이 되고 제 2지대장이 되었다.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고 출정하다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1946년 10월 민족청년단을 결성하였고 1948년 8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1952년 원외 자유당 부당수로 부통령에 입후보 했으나 낙선했다. 1956년 무소속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1956년 제 4대 부통령 선거를 위한 중앙위원회에서 94%로 지지로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이승만이 함태영을 택하자 낙선되고 말았다.

1960년 충청도 지역에서 참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1963년 국민의 당을 결성하고 최고위원이 되었다.

1963년 건국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수여 받았다.

1966년 9월 한일협상반대운동에 동참하여 강연하기도 했다.

광복군으로 활약한 김마리아와 혼인했으며 유일한 아들이 있었고 부인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장군은 부부가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유공자 제 2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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