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고칠수록 더 빛나는 것들
시론-고칠수록 더 빛나는 것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6.16 17:30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

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고칠수록 더 빛나는 것들


지난번 시론에서 필자는, 윤동주 시의 명편 ‘별 헤는 밤’ 말미가 추후에 추가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보완을 권유한 이는 시인의 지기이자 연희전문 후배인 정병욱 교수였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이 네 줄이다. 만약 이 대목이 없었더라면 시의 의미, 서정적 감각, 수미상관한 균형 등이 보다 허약했을 기능성이 많다. 새로 추가된 시의 앞부분은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로 되어 있었고, 정 교수는 “어쩐지 끝이 좀 허전한 느낌이 드네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황순원의 ‘소나기’ 대단원은 원래 있던 네 줄을 삭제했다. 이를 권유한 이 또한 작가의 오랜 지기 원응서 선생이었다. 이 이름 있는 단편의 마무리는 언어의 생략과 여백의 극대화로 모범이 되었다. 「소나기」의 끝은 이렇게 소년 아버지의 말로 되어 있다.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애는 어린것이 여간 잔망스럽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든 옷을 꼭 그대루 입혀서 묻어달라구……” 원래는 그 다음에 다음과 같은 소년 부모의 대화 네 문장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어린 것이래두 집안 꼴이 안될걸 알구 그랬든가 부지요?/ 끄응! 소년이 자리에서 저도 모를 신음소리를 지르며 돌아누웠다./ 쟤가 여적 안 자나?/ 아니, 벌써 아까 잠들었어요… 얘, 잠고대 말구 자라!”

만약에 이 네 문장이 그대로 있었더라면 우리가 ‘소나기’에서 얻을 수 있는 여운과 감동이 훨씬 차감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원 선생은 이는 사족(蛇足)에 해당하니 과감하게 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단편 ‘목넘이마을의 개’에 있어서도 결미 부분에 ‘지금도 경동시장에 가면…’ 하고 개 이야기가 연장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 또한 원 선생의 권유로 삭제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읽혀지지도 출간되지도 않는 작품을 써서 이를 되는대로 석유상자 밑에 넣어두곤 할 때부터, 원 선생은 작가의 유일한 독자였고 훈도(薰陶)였던 셈이다. 작가요 수필가인 두 분의 경우는 험난한 시대에 서로에게 좋은 독자요 친구가 되는 복을 누렸다.

역시 일제강점기에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 모국어를 지키면서 자연친화의 시세계를 가꾸어 온 시인들로 청록파 동인이 있다. 그 중 조지훈이 1946년 ‘목월에게’라는 부제를 붙여 쓴 시 ‘완화삼’은 길 가는 나그네의 외롭고 쓸쓸한 정서, 우리 시골 들녘과 마을의 풍광을 그림처럼 묘사해 보인다. 박목월은 이 시를 받고 감격해 마지않았고 그에 대한 화답으로 ‘나그네’를 지었다. 목월은 이 시를 발표한 지 30년이 지나 그 초고를 공개했다. 그는 이 초고를 백 번 가까이 갈고 다듬은 끝에 발표된 시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글쓰기 수련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초고와 완성본을 비교해 보면 별다른 설명 없이도 퇴고(推敲)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된다.

초고는 이렇다. “나루를 건너서 외줄기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달빛 어린 남도 팔백리/ 구비마다 여울이 우는 가람을/ 바람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에 대비하여 고쳐진 현재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강나루 건너서 밀 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미비한 부분을 고치는 일은 이처럼 힘이 들지만, 그것은 귀하고 값있는 것이다. 그렇게 잘 고쳐지면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감흥을 일으키고 그 주변을 훈훈하게 만든다. 미비한 점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면 항차 잘못된 일을 고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찌 문장뿐이랴, 우리 삶의 주변에는 고쳐야 할 잘못된 일들이 너무도 많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