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사천 제헌의원 최범술 항일공적
진주성-사천 제헌의원 최범술 항일공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6.19 11:2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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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사천 제헌의원 최범술 항일공적

최범술(崔凡述)선생의 본명은 최영환(崔英煥)이고 법호는 효당(曉堂)이다. 1904년 5월 26일 사천 서포면에서 태어났다. 1907년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때 친형 최채술이 의연금으로 동참했다는 말을 들었고 1915년 곤양보통학교에 재학 중 조우제 선생이 교원으로 근무하며 항일정신을 가르치자 영향을 받았다. 1917년 해인사 지방학림에 입학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 동참했다가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물리학교와 대정대학 학부 예과를 수료했다.

1935년경부터 조선불교 중앙총무부장을 지냈으며 명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종법 기초위원이 되었다.

다솔사 일원에서 광명학원을 개설하고 애국청년들을 가르치게 된다. 만해 한용운 선생과 김법린 선생 등이 만당(卍黨)을 결성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37년 12월부터 위문단 일원이 되었다는 주장하는 측이 있다.

광복 후 해인사 주지·불교중앙재단 이사·국민대학 이사장을 역임했다. 1948년 사천 삼천포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되어 큰 공을 세웠다. 1951년 진주에 해인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해인대학을 세워 학장과 이사장이 되었다.

1955년 서울에서 대처승과 소송문제로 법적으로 싸웠으나 실패하고 다솔사에 은거하며 茶道(다도)에 힘쓰게 된다.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비구승들은 서울 시경에 대처승 최범술과 김법린을 상대로 대처승들이 각 사찰의 재산을 착복했으니 그들의 횡령죄상을 처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대처승도 서울지검에 비구승 대표 이청담. 윤월하 등이 태고종 사무실로 불법 침입했다는 혐의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불교의 주도권이 비구승으로 넘어가자 최범술 선생은 귀향해 다솔사에 은거하게 된다.

1969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고 1979년 7월 10일 다솔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1986년 독립운동 공적으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상훈법이 일부 개정되자 1990년 12월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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