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창녕 제헌의원 구중회 항일투쟁
진주성-창녕 제헌의원 구중회 항일투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7.03 16:3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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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창녕 제헌의원 구중회 항일투쟁

경남 창녕군 영산읍 출신 구중회(具中會)의원은 보성중학교와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1926년)했다.
1919년 3·1운동 때 천도교인으로 장진수·김추은 등과 영산읍 결사대를 조직하여 3월 13일 4~5백여 명의 군중을 지도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각종 고문에 시달리다 1919년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창녕군 영산에서는 해마다 3월이 되면 3·1민속 문화제를 58회로 성대한 기념식과 행사를 진행 중이다.
출옥 후 전국으로 다니며 애국 강연을 실시하다 일경에 잡혀 구금되었고 항상 요주의 인물로 감시 대상이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농촌 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천도교 청년당을 조직할 때 동참하였고 청년당 위원으로 약 4년간 활동 봉사하면서 전남 부산 지역과 전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갔다.

광복이 되자 목포여자고등학교로 초빙되어 교장선생님으로 2년 2개월간 근무하고 마산중학교가 개교하자 초대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
1948년 5월 창녕지역에서 제헌의원(制憲議員)에 출마해 당당하게 당선되어 큰 공적을 쌓았다.
1950년 한국 전쟁 때 북한에 의해 납북되어 남북평화통일위원 등으로 임명되었으며 가장 차가운 평북 의주에서 협동농장조합원으로 육체노동을 강요당했다고 전해 온다. 그러므로 정확한 사망 일자를 알지 못한다.
납북된 인사들에 대하여 색안경으로 바라보며 독립유공자 포상에 대하여 남북통일이 될 때 까지 훈·포장 수여를 보류한다고 보훈처로부터 회신을 받았으나 1990년 12월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케 되었다.

구중회 의원보다 3세 작은 아우 구남회(具男會)선생도 1919년 3월 13일 창녕군 영산 결사대 일원이 되어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19년 5월 10일 부산지법 마산지법에서 징역 8개월 형을 받고 같은 해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전국적으로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전개될 때 창녕군에서도 김추은·장진수 등과 함께 발기인대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으며 감옥 아닌 감옥에서 살다가 고문후유증으로 1936년 7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1992년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어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형제 항일투사 내용은 추경화 저서 ‘항일투사열전’2권 138면에 등재되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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