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세종대왕의 영릉(英陵)
진주성-세종대왕의 영릉(英陵)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7.11 16:5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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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세종대왕의 영릉(英陵)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릉이다. 원래 영릉은 헌릉 서쪽에 있었으나 여주로 이장함으로써 5백년의 왕도를 이어가게 한 명당 중의 명당이다. 세종대왕께서 잠드신 영릉과 신륵사는 여주를 대표한다. 여주를 노래한 시가가 많지만 그 중 고려 말 원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에 2위로 급제한 당대의 한학자요 문장가이며 충신인 이곡(李穀)의 시 여주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여주의 경치를 붓 끝에 넣으려면 글은 소동파황산곡이 지어야 하고 글씨는 언진겸이 써야 한다…하룻밤 누 가운데 잤어도 오히려 부족하니다른 날 긴 여가를 내어 조각배를 타리라.
산천은 용문산 치악산 설봉산 원적산이 있다. 영릉의 진산이 곧 북성산이다. 영릉을 에워싼 형상이 마치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듯하다. 뒤에 높이 솟은 현무는 열 폭의 병풍을 두른 듯 완하고 청룡의 새는 겹겹이 산머리를 돌아 용트림하는 듯하다.

안산(案山)을 바라보면 북성산 작은 낙맥이 마치 임금 앞에 신하들이 무릎을 꿇고 조례를 드리는 듯하고 그 어느 산봉우리들도 이름만 붙이면 전설이 곧 쏟아질 것만 같다. 창검을 빼어들고 우뚝 서 있는 듯 한 장군봉, 선비가 정좌하고 일필 휘호를 쓰는 문필봉 충주 월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마치 뱀이 꼬리를 흔들며 헤엄을 치는 듯 어찌 명당이 아니라 하겠는가. 영릉 이 자리는 원래 광주이씨3세조인 이인손(李仁孫)의 묘지였다.

이인손은 태종때 좌의정까지 올랐고 부친 이지직(李之直)은 청렴결백한 관리로 소문난 분이며 그의 조부는 고려 말 문장가인 이집(李集)이었다. 이인손은 아들 5명이 아버지를 닮아 큰아들 이극배는 관찰사를 거쳐 영의정, 둘째 이극감은 형조판서, 셋째 이극종은 중추부사, 넷째 이극돈은 의정부 좌찬성, 막내 이극균은 우의정을 지냈다. 이 집을 5자등과 5자봉군이 된 5군고을이라 불렀다.

세종대왕이 54세를 일기로 승하하시어 서울 현릉에 안장했으나 후에 세조대왕의 꿈에 릉 옆에 절을 세워 명복을 빌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절을 지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묘에 이상이 있어 이장을 결심하고 장소를 물색 했다. 1469년 3월 6일 소현왕후 심씨와 합장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임을 밝히고 이름을 영릉(英陵)이라 하였다. 이장할 장소는 이인손의 묘를 이장하고 이곳에 묘를 쓰기로 결정 이인손의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 비기(秘記)가 나왔다. “연을 날려 떨어지는 곳에 묻도록 하라” 1469년 3월6일 소현왕후와 합장함으로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임을 밝히고 이름을 영릉이라 하였다. 경기도 지방의 최고의 명당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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