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경남 최고 건국훈장 장건상 선생
진주성-경남 최고 건국훈장 장건상 선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7.17 18:0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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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경남 최고 건국훈장 장건상 선생

장건상(張建相)선생의 호는 소해(宵海)이며 이명 장명상 으로 부산에서 태어난 분이며 항일독립운동으로 최고위 훈장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분이다.
장건상(1882-1974)선생은 1916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규식 선생의 동제사 에 가입 활동하고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준비위원이 되어 김규식·이시영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19년 4월 2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정원과 외무부 위원이 되었고 이어 대한적십자사가 상해에서 창립되자 상의원으로 활동했다. 11월 9일 의열단이 만주 길림에서 창립되자 총장이 되고 기밀부 요직을 맡아 활약했다. 1920년 2월 북경에서 의열단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할 때 압록강 중국세관에 있던 영국인 보잉에게 임정 외교차장 이름으로 신임장을 보내어 무사히 국내로 통과되도록 지원했다. 1921년 4월 19일 미국의 이승만 정한경 등이 미국이 조선을 위임 통치토록 하자는 청원서를 제출하자 이를 규탄하였다.

1921년 5월 창조파 원세훈 등과 조선공화정부를 북경에서 조직하자 외무총장 이 되었고 동년 8월에는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여 대표로 참석하고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면담했으며 이어 극동피압박인민대회에 참석했다.
1923년 국내외 지역 대표로 국민대표회 지역 대표로 참석했다.
1924년 임시정부 외교총장으로 의열단원이 입국할 때 혁명선언서 신임장과 위임장을 교부하였다.

1926년 북경에서 김성숙과 함께 잡지 <혁명>을 발간 배포하였고 이어 한국유일독립촉성회 집행위원 7인중 1인이 되었고 남중국으로 파견되었다. 1928년에는 의열단 고문이 되어 폭탄을 제조하여 국내로 반입했다.
1930년부터 북경 화북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반일운동을 전개하자 1939년 일제 형사들에게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 혼절했다.

1941년 국내 법정에서 증서불충분으로 기소유예로 석방되어 만주 홍콩 상해를 거쳐 중경에 도착했다. 1942년 임시의정원 김구 선생이 주석이 되고 이 때 국무위원 겸 학무부장으로 선출되어 활약했다. 1943년 10월 30일 조선혁명당에서 인도공작원으로 파견되도록 중국 국민당에 신분 보장을 요청하기도 했다. 1944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좌우합작과 대동 단결을 위하여 연안에 파견되었다가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1986년 공훈이 크고 높아 부산 경남 울산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하였다. 직계후손 장상진 님이 2019년 7월 광복회 경남지부장으로 선임되어 취임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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