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통영 제헌의원 김재학 항일공적
진주성-통영 제헌의원 김재학 항일공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7.24 16:1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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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통영 제헌의원 김재학 항일공적

통영 제헌의원 김재학(金載學)(1878~1984)선생은 경남 충무시 서호동(통영)에서 태어났다. 주소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 산 68번지에 거주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토목계통의 오사카의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게 된다.
조선일보 1925년 4월 27일자에 의하면 통영군의 김재학은 평양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피체되었는데 사유는 독립단원이라는 이유라고 밝혔다.

1925년 7월 통영지역 8개 단체가 모여 회합을 가질 때 대표로 참석했다.
김재학 선생은 통영 거제 고성 4개 군 청년연맹 준비위원 (1925년 10월)이었고 통영청년연맹(1926년 10월)위원으로 농어촌 청소년들을 모아 애국 계몽하고 일반인들을 청년회관에 모아 계몽강연을 실시했다.

거화(炬火)라는 잡지를 만들어 배포하다 일경에 발각되어 방정표와 함께 체포된 필화사건으로 10개월·8개월간 각각 언도되었고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여 결국 각각 무죄로 석방되었다. (1927년 5월 17일)
친일 단체 3·9회 사건으로 또 다시 피체되었으나 수개월 만에 삭방되었다.

동아일보 통영지국 총무겸 기자로 활동하고 지국장이 되었으나 지국장으로 임명된 지 3개월 만에 일제의 방해로 사퇴했다.

1927년 6월 천도교 종리원에서 소요가 있었고 진압과정에서 부상자가 속출하자 이들을 위한 구제회가 조직될 때 동참했다.

1927년 전국적으로 신간회가 설립되자 통영지역에서도 신간회 통영지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동아일보 1927년 4월 2일 1928년 3월 1일)신간회 통영지회 설립위원 선전부 간사로 3년간 활동 봉사하게 된다.

일본 등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여름방학 겨울 방학을 계기로 귀향한 이들을 즉시 초빙해 강연을 실시하게 되는데 80명 모이는 장소에 2백 여명이 운집하여 항상 대성황을 이루었다.

청년회·신간회·노동자·농민들이 모여 회의하고 강연했던 회관이 문화동 236번지에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2002년 현재 경남도 등록 문화재 36호로 지정 등록되었다.

김재학 선생은 건설 회사를 설립해 사장으로 활동하고 토건협회 이사 등으로 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다.
1948년 5월 통영지역에서 한국민주당에 입당하여 제헌의원 선거에서 당당히 당선되어 크게 활약했다. 제 2대 제 3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다.

1966년에는 삼성운수(주)를 설립해 대표이사로 활동했다.
활약이 대단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한 사실이 확실하지만 지금까지 정부 포상이 성사도지 않았다.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이 18년간 부산 경남에는 한명도 없기 때문에 경남 출신들이 포상을 받기 매우 어렵고 매우 불리한 입장임에 틀림없다. 부산 경남지역에서도 심사위원이 선임돼야 포상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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