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독도(獨島)에 수비대 창설
진주성-독도(獨島)에 수비대 창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7.25 16:4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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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독도(獨島)에 수비대 창설

독도는 경북 울릉군에 있는 무인도로 동서2개의 섬과 바윗돌로 이루어진 화산도로 정주민은 없고 등대가 있다.
독도가 처음 문헌에 나타난 것은 광무 10년(1906) 울릉군청에 보관된 울릉군수 보고서 광무 10년 병오 음력 3월 5일조에 ‘본부소속 독도’라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은 이 섬을 타케시마(竹島)라는 명칭을 붙여 자기네 영토라 주장. 한일간의 정치적 문제로 되어 1952년 우리나라에서 주권을 선언 옛 이름은 우산도 면적은 1.3㎢이다.

우리 어부들이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의 횡포와 방해로 어로작업을 못하고 귀향하는 경우 빈도가 높아지자 예비역 특무상사 홍순철을 대장으로 해서 적수공권으로 의용수비대를 창설 충의와 혈기로 뭉쳤다. 대구에 있는 2군사에 가서 무기를 요청 80㎜ 박격포 1문과 포탄 200발, 경기관총 2문, 포탄 3000발, MI 소총 20정, 실탄 1만발, 카빈총 5정, 실탄다수와 과시용의 20㎜ 포탄 1문 등 수비대로서 위용을 갖추고 1953년 4월 20일 33명의 대원이 독도에 상륙 수비임무에 임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6년 12월 30일까지 4년 동안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함과 여러 차례의 총격전으로 이를 격퇴시키면서 오로지 숭고한 국토방위의 임무수행을 위해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독도를 사수하였다.

수비대의 경비조달은 울릉군에서 지급하는 양곡과 독도에서 자생하는 미역 등 해초와 고동, 전복 등 해류를 채취 충당했다. 대원들의 보수는 처음부터 무보수로 결정했다. 경비초소는 서도와 동도 중 일본의 방향을 잘 볼 수 있는 동도에 세웠다. 그런데 산세가 워낙 험해서 사람은 물론 자재운반까지 모두 밧줄을 타고 산을 오르내리면서 해야 했다.

대원들의 손바닥은 누구 할 것 없이 피멍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경비 근무는 대원을 2개조로 나누어 1개월마다 교대했다. 낡은 3톤짜리 소형 목선이 항해도중 기관고장이나 파도로 인한 항해 불능으로 2-3일씩 바다 위를 표류하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해난사고 한번 없었던 것을 보면 의로운 우리 수비대의 충정을 하늘이 알아준 것 같기도 하다.

국토방위의 신념하나로 천신만고를 극복 의용수비대는 1956년 12월 30일 수비임무 및 장비일체를 경찰에 인계하고 대원 중 일부는 경찰에 편입됨과 동시에 해산되었다. 1966년 4월 12일 수비대장 홍순철에게 공로훈장을 수여하고 대원 12명에게 방위포장을 받았다. 오늘날 독도가 우리 땅이 되고 우리의 바다가 되어 많은 국민들이 가보고 싶어 하고 많은 어선들이 안심하고 조업할 수 있는 것은 독도의용수비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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