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사면초가, 쿼바디스 도미네?
아침을열며-사면초가, 쿼바디스 도미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8.01 18:2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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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선거연수원 초빙교수·역학연구가
이준/선거연수원 초빙교수·역학연구가-사면초가, 쿼바디스 도미네?

‘사면초가(四面楚歌)’는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이 천하를 다툴 때 생겨난 고사성어다. 한(漢)나라에게 항복한 초(楚)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고향인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게 하여 항우의 전투의욕을 꺾고, 그가 사랑하는 우미인(虞美人)과 더불어 자결토록 한 배경이다. 항우의 초나라는 사라지고 유방의 한나라가 중흥하였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뜻인 ‘쿼바디스 도미네’는 폴란드 작가이자 애국지사인 셍캐비치의 소설 제목이다. 1795년부터 123년 동안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어 지배받으며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비참한 역사를 이어왔다. 이 폴란드를 로마제국의 박해 아래 있었던 기독교도에 빗대어 쓴 소설이다. 물론 역사의 필연 법칙이라 할 만큼 어김없이 폴란드 귀족들은 그들의 특권과 재산을 지배국들로부터 보장을 받았으며 국가의 지배에 동의했다. 귀족들은 지배국에 기꺼이 협조하고 또 충성을 맹세했다. 1797년부터 '폴란드(polska)'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기로 서로 합의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영토를 앞두고 주변의 강국들은 어김없이 쟁탈전을 벌인다. 약소국은 강국들의 힘의 각축에 따라 분할지배의 형태로 귀결된다. 조선반도도 그랬다.

우리도 스스로의 힘이 아닌 연합군의 개입에 의한 일본 제국주의 강압과 약탈로부터의 타율적 해방이었기에 남북분단도 어쩌면 필연적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형식적으로 남북모두 입으로는 ‘통일’을 외치지만, ‘통일’에 대한 속 그림이 진정 같은 것인지는 의심스럽기만 하다.

이런 와중에 우리를 옥죄는 압력은 대내외적으로 매우 드세다.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우리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핵심소재 3개 품목 수출 규제를 강화를 발표했다. 이어 8월에는 한국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함으로써 한국산업을 옥죌 심사를 노골화하고 있다. 미국은 한발 물러서 어정쩡한 빈 모습이다. 7월 23일에는 러시아의 군용기가 독도 영공 침범하였고, 마치 중국과의 동맹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나란히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의도적으로 침범하였다. 우리 국민들은 분노하고 안보에 대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7월 24일에 중국은 국방백서에서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THAAD·사드) 배치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추후 중국의 위협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 걱정된다. 7월 25일에는 북한이 고도로 발전된 단거리 탄도미사일 2발을 발사하고, 7월31일 또 방사포 2발을 쏘면서 노골적으로 남한 당국에 대한 경고라고 위협했다. 미국과의 대화에 주제넘게 끼어들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여당은 ‘전략적 침묵’ 또는 ‘우려’할만한 수준이라고 발표한다.

폴란드의 ‘나라 없는 비참함’과 국권을 침탈당한 ‘대한제국’ 때의 주변 상황이 지금 이 순간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데자뷔다.

사실 그동안 일본은 늘 주변국을 흡수하려는 야욕을 가져왔고, 야욕을 채우려 노력하였으며, 지금도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하여 총력을 쏟고 있다. 예컨대 유구국(류큐, 오키나와)을 1609년에 강제로 점령하여, 1879년에 현으로 편입시키면서 유구국의 전통들을 거의 말소시켜버렸다. 1868년 메이지유신 후 1869년 개척사(開拓使)를 설립하여 ‘에조치’의 명칭을 ‘홋카이도(北海道)’로 바꾸어 버렸다. 1886년에 홋카이도청 설치하여 토착민인 아이누의 숨통을 막아버렸다. 지금 중국과는 ‘조어도(센카쿠섬)섬을, 러시아와는 쿠릴열도 도서 에토로후, 쿠나시리, 하보마이, 시코탄을 둘러싼 분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의 독도도 국제 분쟁 지역으로 만들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는 2005년 마산시 의회가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했지만, 그냥 찻잔 속 바람일 뿐 더이상 진전이 없다. 조선 ’세종실록‘, 성종 때 만든 ’동국여지승람‘, 1750년의 ’해동지도‘,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심지어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 자신이 직접 만든 ’팔도 총도‘에도 대마도를 분명히 조선 영토라고 표기하고 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때 대마도를 일본의 직할지로 편입시켰다. 해방 직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일본에 60여 차례나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였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이를 묵살하고 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도, 한일합병 전후에도 그랬던 것처럼, 2019년 8월 이 순간에도 한반도의 지배층 인사들은 서로 자기들만의 부귀영화 영달의 기준에서 시운(時運)을 아전인수로 해석하고, 네 편 내 편으로 갈라 국민을 이간질하여 편싸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을 뿐, 이들에게서 국민과 나라의 미래를 위해 대안을 고민하는 모습은 눈곱 반 만큼도 보기 어렵다.“대한민국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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