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영혼 없는 공무원을 위한 변명
시론-영혼 없는 공무원을 위한 변명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8.18 15:5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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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동/경남도립거창대학교 총장

박유동/경남도립거창대학교 총장-영혼 없는 공무원을 위한 변명


흔히 공무원을 비하할 때 ‘영혼이 없다’고들 한다. 윗사람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마음속으로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소신 있게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공무원 사회를 두고 이렇게 표현한다. 무엇이 영혼 없는 공무원을 만드는가? 치열한 경쟁을 거쳐 공직에 입문한 수많은 공무원들이 처음부터 영혼 없이 바람 앞에 드러눕는 풀잎처럼 행동했을까?

1997년 9월 경기도 화성군 사회복지과에 씨랜드라는 청소년 수련시설 설치운영 허가 신청서가 들어왔다고 한다. 현장 확인을 해보니 콘크리트1층 건물에 컨테이너 52개를 얹어 2,3층 객실을 만든 부실시설이었다. 담당팀장은 검토 끝에 신청서를 반려했다. 그러자 상사의 압력, 민원인의 회유, 심지어 폭력배까지 동원해 위협을 가해왔지만 끝끝내 허가를 불허했다고 한다. 화성군에서는 담당팀장이 말을 듣지 않자 다른 부서로 전보발령을 한 후 허가를 하였고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유치원생 19명을 포함, 23명이 사망하는 대형 화재참사가 발생하였다.

프란시스켈시라는 미국 FDA(우리나라의 식품의약품안전처에 해당) 젊은 심사관이 있었다. 그 당시 유럽에서 임산부들의 입덧부작용을 완화시키는 ‘탈리도마이드’라는 독일의약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1960년까지 전 세계 46개국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마침내 탈리도마이드의 미국 내 판매를 위해 FDA에 승인신청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 약품이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는데 동물에게는 효과가 없는 점이 이상하여 프란시스켈시는 6차례나 승인을 거절했다. 그런 와중에 유럽각국에서 팔다리가 없거나 짧은 ‘해표지증’을 가진 기형아 출생이 급증하였다. 독일에서만 5000명, 전 세계적으로 1만2000명의 기형아가 출생하였고 죽어서 태어난 사산아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역학조사를 해보니 ‘탈리도마이드’의 복용과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미국 정부에서는 탈리도마이드의 공포로부터 미국을 지켜낸 공로를 인정하여 프란시스켈시에게 가장 높은 등급의 시민훈장을 수여하였고 당사자는 자기가 한 일은 서류를 깔아뭉갠 것 밖에 없다고 말했다한다.

소신을 가지고 허가신청서를 반려한 공무원은 전보되고 씨랜드 화재사건이후 비망록을 제공하여 동료 공무원들을 무더기로 구속시켰다는 조직 내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으며 결국 명예퇴직을 했다. 나라는 다르지만 소극적으로 ‘서류를 깔아뭉개고 있었던’ 공무원은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았으며 미국 FDA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그해 가장 우수한 직원에게 ‘Kelsey Award’를 수여하고 있다.

최근 1421명의 목숨을 앗아간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8년에 걸친 수사가 마무리 되어 제조·판매업체 등 관련자 56명이 기소되었다. 자칫 원인미상으로 넘어갈 뻔했던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관의 끈질긴 노력덕분이라고 한다. 바이러스나 세균에 의한 감염이 아니라는 게 확인됐음에도 환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간 역학조사관의 눈에 공통적으로 가습기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결국은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영혼이 없는 공무원’은 스스로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조직이 만들어 낸다. 처음부터 공무원에게 영혼이 없지 않았으며 지금도 소신을 가지고 일하는 공무원이 대다수라고 생각한다. 소신을 지키다가 직접 불이익을 당했거나 불이익을 당한 동료들을 보면서 ‘영혼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30여년 공무원 생활하면서 상사의 지시와 내 소신이 맞지 않는 경우를 많이 경험하였다. 마음속으로 아니라고 하면서 상사의 지시이니까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직위가 높다고 해서 항상 옳은 정보에 의해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다.

왜곡된 정보에 의해 잘못된 지시를 할 수도 있는데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상사에게도, 조직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 다만 면전에서 특히, 여러 사람들이 있는 회의석상에서 공개적으로 지시에 ‘NO’라고 하는 경우는 옳고 그름을 떠나 상사들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용을 잘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런 경우 일단 현장에서는 알겠다고 한 후 하루 이틀정도 고민을 해본 뒤 조용히 면담을 하여 설명을 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면 대부분의 상사가 경청하고 수용을 하게 된다.

소신과 고집은 다르다. 고집은 편협한 사고에서 나오지만 소신은 자신의 업무에 대한 자신감과 사심이 없는데서 나온다. 사심이 들어가면 소신 있는 직언을 할 수가 없다.

스스로 반문해 본다. ‘과연 나는 영혼 있는 공무원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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