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방관의 시대
진주성-방관의 시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8.20 17:2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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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방관의 시대

여름밤의 무더위를 소름 돋치게 하는 구급차의 다급한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창문을 열고 식구들 모두가 까치발을 하고 황새목을 뺀다. 오래전의 이야기다. 요즘은 소방차가 아무리 앵앵거리고 구급차의 다급한 절규에도 내다보지도 않는다. TV 볼륨만 올린다. ‘어쩌나’가 아니고 ‘시끄럽다’ 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를 생각해 볼 때가 늦었다. 경제학에 나오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으로 치부하기에도 너무나 잔인하지 않은가. 감각이 무뎌져서 일까, 감정이 메말라서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결과가 수용할 수 없는 방법은 실행할 가치가 없다는 지극히 객관적인 논리지만 도움주기를 기피하고 도움받기를 거절하므로 감성의 황폐화를 불러오며 사회공동체의식까지 피폐화 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방학을 맞아 외가에 온 손녀딸이 팥빙수가 먹고 싶대서 집 앞의 빵집으로 갔다. 앞선 할머니 한 분이 터치형자동문을 열지 못하고 밀어보기를 거듭한다. 쫄랑쫄랑 앞서가던 손녀딸이 뒤에서 지켜보다 못해 ‘할머니 여기를 누르세요’ 하고 손으로 위치를 알려준다. 나는 손녀딸이 선 듯 눌러 줄까봐 내심 걱정을 했다. 그 짧은 순간이지만 왜 걱정을 했을까. 지난 4월 제주도 서귀포에서 꼭 같은 상황이 있었다. 관광객인 젊은이가 터치스위치를 눌러주자 밀기만 해대던 어떤 할머니가 중심을 잃고 넘어져 병원으로 옮겼지만 사망을 하여 젊은이가 과실치사혐의로 입건됐던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다. 유족도 용서할 수 없다던데 뒤끝은 모르지만 젊은이의 허망함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목적이 수단을 포용하지 못하고 결과에 지배되는 시류가 참담하다.

저녁밥상머리에서 빵집 문을 열어주지 않고 왜 스위치만 알려주었냐고 외손녀에 물어 봤다. ‘노인들이라도 나서서 직접 도아주지 말라고 엄마가 말했어요’ 경우를 들어서 이야기를 해줬겠지만 밥알이 모래알 같이 입안에서 맴돈다.

일상속의 배려는 어디까지 해야 할까. 넘어져 있어도 일으켜 세우다 털썩 주저앉기라도 하면 무슨 낭패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고 쏟아진 물건도 주워주다가 도독으로 몰릴까봐 못 본체 해야 하는 세상의 변화가 어딘가로 잘 못 가는 것 같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들인들 무거우랴’ 요즘은 큰일 낼 소리다. 노인은 날로 늘어 가는데 어쩌면 좋을까. 스스로 방관자가 되든지 아니면 기피자가 돼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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