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강제동원 없었다’ 막말 교수들
진주성-‘강제동원 없었다’ 막말 교수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8.21 16:3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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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강제동원 없었다 망말 교수들


서울대학교 이모 교수와 낙성대연구소 이모 교수가 지은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통하여 강제 징용은 없었다. 소년 소녀들은 심부름만 시켰다. 일본인 노동자 보다 더 많은 임금을 지급했다. 자발적이었다. 고국 부모님한테 송금토록 했다. 한국인은 거짓말을 잘한다 했으니 이교수도 한국인으로 거짓말을 잘하시네. 홍준표 전 대표도 식민사관과 일치하는 내용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친일 프레임에 걸려든다라고 했으며 장제원 의원도 비판적인 글을 발표했다.

근로보국대 전국 21만명중에 약 4만 여명이 생존해 있어 증인으로 채택할 수 있는데 지금이라고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무슨 망말인가.

1940년대 전쟁 중에 일제가 신사적으로 대하고 고맙게 했다는 뜻인지 묻고 싶다. 참으로 요상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일본 순사가 지방을 다니며 마을을 순찰할 때 긴 칼을 차고 마을 친일파들을 시켜 지시하면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역 친일파들은 식량을 수탈하고 쇠덩어리(놋그릇) 같은 것은 무조건 압수해 가고 군으로 가지 않고 보국대로 가지 않으며 배급을 주지 않았고 삼천포 통영 진해 부산 등 해안 도시에는 쌀 보리 콩 옥수수 귀리 등을 산처럼 쌓아놓고 전쟁터로 운송한 사실이 사진. 증언 등으로 확인되는데 잘난 부모를 만나 호식호식하며 보리밥도 못 먹던 시대인 1950년~1960년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갔다 온 이들은 근로 보국대 서민들의 어려움을 어찌 알겠는가.

서민들의 어려움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으며 보릿고개라 하여 피죽도 못 먹던 시기를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헛소리하는 것이며 일제 때 강제 동원된 사실도 어찌 알겠는가.

1938년 4월 1일 국가 총동원법을 만들고 1939년 7월 8일 강제 동원령 제정 및 시행으로 21만명이 동원되고 1941년 11월 21일 국민근로대 보국협력법을 만들어 무료 봉사케 했기 때문에 요즘도 임금도 없이 일하는 것을 보면 보국대하느냐 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1943년 7월 20일 국민강제 징용법을 만들어 탄압하였고 1944년 여자정신 위안부 근로 조정법을 공포하여 10세부터 45세까지 동원하여 전쟁터로 투입해 하루 14시간 이상 일을 시키는 혹사를 하고 매질을 하고 죽게 만들었다.

서울대학교 이모 교수는 한국인은 거짓말을 잘한다 했으니 이교수도 한국인 이니 책의 내용도 모두 거짓이라고 스스로 확인시키고 있어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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