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사랑이 증발한 시대를 위하여
시론-사랑이 증발한 시대를 위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9.01 15:0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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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
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사랑이 증발한 시대를 위하여

어느 여름날, 영국의 한 소년이 스코틀랜드 시골로 놀러 갔다. 날이 무척 더워서 소년은 호수에 들어가 수영을 하게 되었는데, 그만 발에 경련이 나고 말았다. 그가 거의 익사하게 될 무렵에 부근에서 일하던 한 시골 소년이 비명을 듣고 달려와 구해주었다. 그 영국 소년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자, 아버지는 아들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 소년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오게 했다. 그 소년의 소원은 의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재산이 많은 영국 소년의 아버지는 시골 소년이 의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시골 소년은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충실하게 공부했고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1928년 저 유명한 페니실린 발명의 위업을 이루었고 1945년 노벨 의학상을 받았으며 귀족의 작위까지 얻었다. 그가 바로 알렉산더 플레밍 경(1881-1955)이다. 그런가 하면 호수에 빠졌던 영국 소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구한 수상 윈스턴 처칠 경(1874-1965)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처칠이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및 소련 수상 스탈린과 회담을 하게 되었을 때 폐렴으로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의 친구 플레밍이 발명한 페니실린으로 고침을 받았다. 플레밍은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면서 전쟁의 도탄에서 세계를 살릴 정치력을 구했으며, 처칠 부자는 한 시골 소년을 도움으로써 질병의 고통에서 인류를 구할 신의학을 발굴한 셈이다.

미국 청교도 문학의 대표적 걸작 <주홍글씨>를 쓴 너대니얼 호손(1804-1864)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고독하게 자랐다. 지극히 주변머리가 없던 호손은 생활이 궁핍했고 성격이 침울했다. 나중에 그가 미국의 당대 최고 소설가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친구들 덕분이었다. 호손이 보든 대학을 다닐 때 절친한 세 친구가 있었다. 첫 번째 친구는 호레이쇼 브리지라는 이름으로 상당한 부호의 아들이었는데, 신출내기 호손을 위해 조건 없이 출판비를 부담해 주고 그가 문단에 데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친구는 장편의 서사시 『에반젤린』으로 유명한 시인 헨리 롱펠로우였다. 호손보다 먼저 문단에 자리 잡은 그는 친구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책의 서문을 써주고 친구가 이름을 얻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세 번째 친구는 후에 미국의 제14대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피어스였다. 대학시절부터 사교적이고 수완이 좋았던 피어스는 여러 가지로 호손을 도왔으며, 대통령이 되어서는 친구가 만년을 아늑하게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말년의 호손은 피어스의 호의로 영국 리버풀의 영사로 가서 평화로운 집필생활을 하였다. 호손은 피어스의 전기를 써줌으로써 그 신세를 갚았다.

호손이 죽자 형제나 다름없던 친구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전송해 주었다. 훌륭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남으로 인하여 호손의 생애가 복된 것일 수 있었고, 세 친구는 그들의 아름다운 우정의 결실로서 미국이 자랑하는 아메리카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문필을 추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 모두는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호화롭게 장식한 거인이요 거장들이다. 비록 우리가 그들처럼 시대를 넘어서 인구에 회자될 말한 중량을 갖지 못한 갑남을녀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온 생애를 통해 모범을 보인 사랑의 결실을 본받지 못할 까닭은 없다.

사랑을 베푼 자가 사랑을 되돌려 받게 되고 사랑을 받아본 자가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소중한 깨우침이 거기에 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물고 사회 지도층에서는 그것이 훨씬 더하다. 하기로 한다면 우리 주위에는 사랑해야 할 이들이 너무도 많다. 이타적 사랑이 증발해버린 우리 시대에 정말 깊이 되새겨 볼 얘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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