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퇴계의 자명과 율곡의 제문
진주성-퇴계의 자명과 율곡의 제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9.05 18:0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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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퇴계의 자명과 율곡의 제문

퇴계 이황(단기 3834년 음 11월 25일(1502년 1월 3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진보이씨 21세때 허씨와 결혼 28세때 진사시험에 합격 49세의 끝날 무렵 용기를 내어 풍기군수 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원대한 학문과 인격완성의 꿈을 꾸면서 58새때 2월 어느날 청년율곡 이이가 계상서당으로 찾아와 3일동안 도학에 관하여 토론 도학을 공부했다. 70세(1570) 1월 8일 아침 “분재 매화에 물을 주라”명하고 눈을 감으셨다.

돌아가신 뒤 직접 써놓은 자명(自銘)이다.“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커 가면서 병통도 많았구나, 중년에는 어이해 배움을 즐겼으며 만년에는 어이해 벼슬을 받았던고, 배움은 찾을수록 더욱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할수록 더욱 불어나더구나, 나아가 일함에는 실패하고 물러나 갈무리함에는 뜻을 지켰으나, 나라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성인 말씀에 참으로 두려웁구나 산은 높고 높으며 물은 솟아나서 끊임이 없는데 벼슬 전 평민 옷을 너울거리며 온갖 비방 훌훌 벗어버렸으나, 내 그리운 님 길이 막혔으니 나의 패물 누가 봐줄거나, 옛사람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나의 마음 쥐고 있었지만, 나는야 어찌 오는 세상을 알 수 있으리오 지금의 눈앞도 잡지 못하는데…근심속에 즐거움 있고 즐거움 가운데 근심있는 법, 조화타고 다함으로 돌아가는데 다시 무엇을 구하랴”

율곡(이이)의 제문(祭文)을 40세의 나이에 지었다. “판단의 기준을 잃고, 부모를 잃고, 주인을 잃고, 희망을 잃은 세상이었습니다. 임금이 허둥지둥 하신들, 그를 보필할 사람 없고, 어린아이가 울어댄들 그를 구해 줄이 없으며 온갖 이상 현상이 다 생겨도 이를 막아줄 현인이 없고, 아득한 긴긴 밤이라서 따스한 볕을 쬐어 줄 길이 없었습니다. 아! 선생님 탄생하심은 참으로 잃어버린 기운이 모인 것이었습니다. 옥처럼 따뜻하신 모습이 참으로 순수하셨습니다. 뜻은 빛나는 태양을 관철하고 행실은 가을 물보다도 맑았습니다.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하여 나와 남의 틈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책을 보시고 신묘한 경지를 사색하시며 정밀하게 연구하여 실처럼 쪼개고 터럭처럼 나누어서 그 깊고 아득한 도학의 경지를 휑하니 보고 얻었습니다. 도학은 원래 뭇 학설이 서로 어긋나고 드넓고 섬세하였지만 이를 절충하여 하나로 모아 통해 놓으셨으니 자양(주자)선생이 그 스승이었습니다.

정계의 급한 물살에서 용감하게 물러나와 무리를 이탈하고 사람들을 벗어나서 깊이 산속에 들어가 도를 지키셨으니 부귀는 한낱 뜬구름이었습니다…철인께서 서둘러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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