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문화재단 ‘포스터로 보는 한국영화 100주년’ 개최
창원문화재단 ‘포스터로 보는 한국영화 100주년’ 개최
  • 최원태기자
  • 승인 2019.09.09 16:28
  • 9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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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까지 창원성산아트홀…‘아리랑’ 에서 ‘기생충’ 까지
▲ 창원문화재단 ‘한국영화 100주년 특별전’ 개막식 후 전시관람 모습
창원문화재단(강제규 대표이사)이 지난 6일부터 오는 12일까지 창원성산아트홀에서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고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을 축하하는 ‘포스터로 보는 한국영화 100년’展을 개최한다.

지난 한국영화의 출발을 알린 1919년 작품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아리랑’, ‘오발탄’에서 ‘실미도’와 최근 칸영화제 수상작품인 ‘기생충’까지 지난 백년의 우리 영화사를 빛낸 영화 포스터 500여점이 역대 최대 규모로 전시되고 있다.

전시되는 포스터는 개인소장본과 영화진흥위원회 남양주종합촬영소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보관되어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들을 포함하며 이번 전시를 계기로 관람객과 만나게 된다.

영화 포스터를 장식하는 제목과 크레딧은 문자예술이자 타이포그래피로 예술계와 일반인들의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포스터 상의 각종 사진은 영화를 대표하는 이미지이자 시대상을 담아낸 거울이기도 하다. 영화 포스터 이외에도 예술성 높은 영화의 명장면으로 구성된 스틸사진과 시나리오 원본들은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가 온 국민이 가장 즐겨 찾는 장르인 영화를 소재로 한 만큼, 전시 애호가뿐 아니라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시민들이 성산아트홀을 찾을 것으로 기대된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각종 포스터와 영상 기록들

이번에 소개되는 500여점의 포스터는 각각이 영화사의 중요한 사료이자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영화 포스터를 소재로 한 전시로는 최대 규모다. 전시되는 포스터에 담긴 추억의 배우들과 크레딧에 표기된 영화 스태프까지 더하면 가히 한국 영화 역사를 총 망라한다고 볼 수 있다.

‘아리랑’에서 ‘기생충’까지 우리 역사의 질곡을 오롯이 담아낸 또 하나의 유물전

이번 전시는 우리 역사의 큰 전환을 다섯 시기로 구분하고, 시대를 지배한 인식과 과제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1919~1945 한국영화의 시작, 일제 강점기 민족의 절규

1919년 단성사에서 최초로 상연되며 한국영화 역사의 시작을 알린, 활동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전시장의 입구를 연다. 이어 1926년에는 춘사 나운규가 원작, 감독, 주연을 맡은 ‘아리랑’이 소개된다. ‘아리랑’은 우리 무성영화의 대표작임에도 불구하고 필름이 전해지지 않는 만큼 포스터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이외에도 윤백남의 ‘홍길동’(1923년), 최인규의 ‘국경’(1923년), 방한준의 ‘성황당’(1939년)등 좀처럼 보기 힘든 포스터가 이 시기의 우리 삶의 애환을 그려내 줄 계획이다.

◆1945~1959 해방과 이념갈등, 6·25 한국전쟁

해방이 되자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년)가 해방 후의 감격을 영화로 만들었고 신경균의 ‘새로운 맹서’(1947년), 한영모의 ‘성벽을 뚫고’(1949년)과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의 비극과 혼란 속에서도 영화 제작은 멈추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전쟁영화 ‘삼천만의 꽃다발’(1951년, 신경균 감독)이 피난처인 부산에서 만들어졌고, 6.25전쟁 직후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소재로 다룬 ‘피아골’(1955년, 이강천 감독)이 개봉되어 이념과 인간성의 갈등을 표현한 우수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1960~1969 한국영화의 성장과 검열의 수난기

한국영화의 성장기를 만난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성장을 견인한 거장들이 활약한 시기다. 독특한 시선으로 예술영화라는 평가를 이끌어 낸 걸작 ‘하녀’(1960년, 김기영 감독),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최고봉 ‘오발탄’(1961년, 유현목 감독),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신상옥 감독)가 이 시기에 관객과 만난다. 가난한 시절을 이겨내는 서민의 삶을 다룬 걸작 ‘마부’(1961년, 강대진 감독)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4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이만희 감독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과 ‘만추’(1966년) 등을 제작했고 ‘삼포 가는 길’(1975년)을 유작으로 남기기도 했다. 1962년 제정된 영화법으로 영화검열이 시작 되고 국책영화가 의무화 되며 한국영화의 암흑기라고 볼리는 1970~1980년대가 펼쳐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무로가 재건되며 신성일, 엄앵란 콤비의 청춘영화 ‘맨발의 청춘’(1964년, 김기덕 감독), ‘아네모네 마담’(1968년, 김기덕 감독) 등이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1970~1989 산업화와 청년문화의 등장

고도성장으로 열린 풍요의 시대에 성장 이면의 그늘을 돌아보는 영화인들의 노력이 이어졌다. ‘별들의 고향’(1974년, 이장호 감독), ‘영자의 전성시대’(1975년, 김호선 감독) 등의 영화들은 이 시기에 만연했던 성 풍속과 젊은이들의 좌절을 잘 그려내고 있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시대를 거부하는 몸짓은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를 중심으로 싹트게 된다. 기존 관습에 저항하는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방’(1984) 등이 이 시기에 주목받았다. 민족의식이 높아지면서 민족정서가 가득한 영화들이 선보여지는데 특히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는 전통적 서정을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씨받이’(1986)는 영화배우 강수연을 월드스타로 등장시켰으며 ‘서편제’(1993)는 전국적인 흥행 성공으로 한국영화의 전기를 마련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사회 체제에 저항하고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모습들이 표출되는데 ‘구로아리랑’(1989년, 박종원 감독),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년, 박광수 감독) 등이 이를 표현한 발자취들이다.

◆1990년~한국영화산업의 변화, 거대자본의 유입

1990년대부터 소재와 형식면에서 다양성이 싹트고 새로운 영화 인재들이 한국영화의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독립제작사들이 하나 둘 활기를 띠기 시작하기도 한다. 개방된 문화 속에서 자란 세대의 밝은 웃음과 깔끔한 형식은 흥행의 성공을 자극하면서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하는 기획영화의 새로운 물결로 이어졌다. 그 시작으로 당시 신인 감독이었던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1992)가 대표적이다. 2000년대에는 ‘실미도’ (2003, 강우석 감독), ‘태극기 휘날리며’(2004, 강제규 감독) 등 18편의 영화가 천만 관객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1962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작 ‘마부’(1962,강대진)로부터 진출된 세계 무대로의 진입이 1987년 제44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강수연 ‘씨받이’(1987, 임권택 감독)를 거쳐 마침내 2019년 제72회 칸영화제에서 한국영화로서는 최초로 ‘기생충’(2019, 봉준호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룬다. 최원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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