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사명대사와 표충비
진주성-사명대사와 표충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9.15 16:1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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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봉스님/진주 여래사 주지·전 진주사암연합회 회장
동봉스님/진주 여래사 주지·전 진주사암연합회 회장

밀양시 무안면에 소재한 표충사(表忠祠)에 가면‘땀 흘리는 비’로 유명한 표충비가 있다. 이 비석은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를 전후해서 어김없이 땀을 흘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1910년 경술국치, 1919년 3·1만세운동, 1945년 광복, 1948년 이승만 대통령 취임, 1950년 한국전쟁 등의 사건마다 이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특히 표충비는 3·1만세운동 때 흘린 땀의 양이 100리터가 넘는 5말 7되에 달했다고 한다.

이 비석은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업적을 기리는 비이기 때문에 나라의 중대사에 땀을 흘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 영규대사와 함께 나라가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시대에 승려 신분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선 승병장이다. 살생을 말라는 계율을 어기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시어 승려로서 참된 길을 가신 분이시다. 조정과 유생들이 왜적을 피해 도망을 갈 때 승병장으로 왜적과 맞선 것이다.

무안면에 표충비가 세워진 것은 이곳이 사명대사의 출생지이기 때문이다. 사명대사는 왕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스승인 서산대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1년 동안 묘향산에 머물렀다가 고향인 밀양 영축산 동쪽 기슭에 백하암(白霞庵)이란 자그마한 암자를 지어 지낸 적이 있다. 사명대사가 입적한 뒤 백하암에 표충사라는 사당을 지어 사명대사를 제향하고 비를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은 당시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불러 포로 귀환 임무를 부여한다. 스님은 일본에 들어가 협상 끝에 3000여명의 포로를 송환하는 데 성공했다.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사절단으로 갔을 때 냉각진법을 쓰신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항구에서 궁궐로 가는 길에 1만여자가 넘는 병풍에 쓰인 글자를 모두 외워서 왜국의 관리들을 놀라게 했으며, 독사가 우글거리는 욕탕에 안내된 후에 염주를 던져 독사를 물리쳤으며, 밤새 온돌에 장작불을 심하게 지폈으나 다음날 아침 수염에 고드름이 달려있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대접을 잘 받으시고 수천에 이르는 우리의 임진란 포로들을 무사히 데리고 귀국을 하셨고 임금으로부터 관직을 하사받으셨으나 마다하셨다. 이런 연유로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도 표충비에 남아 있어 국가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의 경제 압박으로 나라가 어려운 이때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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