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정치적 거짓말
아침을열며-정치적 거짓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9.16 14:0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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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선거연수원 초빙교수·역학연구가
이준/선거연수원 초빙교수·역학연구가-정치적 거짓말

‘병법은 속임수다(兵者, 詭道也)’ 손자병법 시계편 제1장에 있는 손무가 제시한 여러 전술 중 하나다.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국가가 죽느냐 사느냐의 위기 순간에 어쩔 수 없이 가동하는 최후의 방식이다. 국가의 존망(存亡)이 위태로 울 때 어쩔 수 없이 가동하여야 하는 군사력은 그래서 극비(極祕)사항이고,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적(敵)들을 교란시키는 속임수를 기본으로 한다. 나라를 지켜 보존하고, 이겨 쟁취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취하는 극히 비정상적 상황에서의 비인도적 전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생활에서 속임수를 바탕으로 한 거짓말과 교묘한 말 놀림은 일상적으로 행해진다. 어떤 의미에선 식물의 보호색과 동물들의 속이는 행동을 보면 이런 속임수는 자기 생존을 위한 생명체의 천연적 본성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조차 하다.

우리 역사에도 씻을 수 없이 안타까운 거짓말 보고(報告)가 있다. 바로 김성일의 보고다. 일년여 동안 조선의 통신사로 일본으로 간 서인인 황윤길과 동인인 김성일은 돌아와 정반대의 극과 극의 보고를 한다. 순전히 당파적이라는 게 중론(衆論)이다.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춘 결과 조선팔도 백성이 당한 전화(戰禍)의 고통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물론 김성일의 후손들은 당시 여름철에 민심을 고려한 것이고, 꼭 그런 것은 아니라도 국가적으로 전쟁 준비는 되어있었기 때문에 김성일의 거짓 보고 때문에 임진란의 폐해가 더 컸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어떻든 유성룡의 간청으로 김성일은 복권되고 진주성 싸움 중 학질에 걸려 사망한다.

당시 권세를 휘두르며 서슬 퍼런 종실의 비리를 질타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로 불렸던 강직하고 올곧은 심성의 김성일이 왜 일본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고 거짓 보고를 하였을까?

많은 이들은 지금도 우리 정치와 현실을 짓누르고 있는 고질적인 ‘당파감정(黨派感情)’을 지적 한다. 흔히 말하는 망국적인 ‘진영논리(陣營論理)’다. 내가 속한 조직은 무조건 옳고 정당하며 다른 집단은 사악하고 격퇴시켜야 할 대상이다. 아주 저열한 감정과 논리다. 이해와 관용의 공존보다 적대적 박멸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편협한 이념(理念)에 함몰되어 스스로 우쭐하거나, 한편으로 세상이 자기 뜻과 맞지 않는다고 스스로 광란하다 한평생을 마치고 만다. 스스로의 이념구현 광란에서 다른 사람들은 지옥 같은 고통을 겪는다.

나아가 힘없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크기는 권력이라는 괴물을 거머쥔 집단들이 보수와 진보라는 가면과 너울을 둘러쓰고 이를 거침없이 휘두를 때 더욱 커진다.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권력을 잡느냐 못 잡느냐의 구분은 비교적 분명했지만, 보수와 진보의 개념도 실천도 불투명했기 때문에 이런 이분법의 폐단은 더욱 심하리라 본다.

그동안 정치집단들의 이런 정략적 거짓말에 나처럼 어리석고 힘없는 무지랭이들은 무던히도 속아 왔다. 지방대를 살린다는 정치적 레토릭에 속아 왔고, 지방이 발전한다는 환상적 말에 속아 왔다. 하지만 지금의 지방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지방의 아파트는 미분양 조짐을 보이는 반면, 서울의 아파트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그리하여 무엇엔가 겁에 질린 내 주변의 촌사람들은 어디 한몫 잡을 것이 없을까 하는 미욱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그동안 아등바등 마련한 초라한 쌈짓돈을 붙들고 서울로 달려간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느새 다른 나라로 튀어버린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붙어있는 목숨줄이 죄업(罪業)인 중생(衆生)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겁에 질려 돈 많고 힘 센 권력자들의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 숨만 쉰다.

헤게모니를 장악한 집단들의 광풍(狂風)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바가 없다. 그놈이 그놈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있는 놈이 더하고 배운 놈이 더 독하다. 예나 지금이나 패거리 진영증오(陣營憎惡)는 더욱 치열하다. “그래 우리 패거리는 정당해. 우리 패거리는 힘이 있어. 힘없고 돈 없는 네놈들은 그저 입 다물고 굿이나 보고 박수나 쳐. 괜히 걸리적거리지 말고 우리가 던져 놓은 프레임의 덫에 걸려 표나 찍어. 혹여나 떡고물은 꿈도 꾸지 마! 우리 패거리 먹을 것도 모자라!” 이런 속셈을 감추고 그럴듯한 말을 하자니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울림이 공허하다.

아! 예수가 꿈꾸었던 하늘나라는 어디인가. 미륵부처의 도솔천은 정녕 꿈이려나. 633여년 전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에 세운 매향비에 새긴 용화삼회(龍華三會)의 간절한 원(願)은 진정 원에 그치고 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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