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를 호시(虎視)하다
칼럼-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를 호시(虎視)하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9.19 16:0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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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식/경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교수

박성식/경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교수


어릴 적, 2층 다락방으로 올라가다보면 큰 호랑이 그림이 무거운 유리 액자에 끼워져 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달마도만큼이나 흔하게 걸려 있던 호랑이 그림은 가정에 좋은 기운을 가져 준다고 믿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의 회화에서 호랑이가 자주 등장한다. 단군 신화에서 호랑이는 웅녀와 같은 세대니 국조(國祖) 단군보다도 어른이다. 전래 야담이며 설화에서도 인기가 단연 으뜸이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는 백호가 등장하기 때문에 호랑이는 우리 민족에게 매우 친근한 이미지가 있다. 고려 시대에 불교를 국교로 삼았을 때에는 호랑이가 불법을 수호하는 동물로 여겨졌다. 지금도 절에 가면 대웅전 밖 외벽에 부처가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또 민속 신앙에도 호랑이가 산신령과 함께 짝이 되어 등장하곤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장례를 치르면서 시신을 모시는 빈전에 사신도를 그려 설치했는데, 그중에 흰 호랑이를 그린 백호도가 있었다.

호랑이 그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을 꼽으라면 단연 김홍도의 그림일 것이다.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는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년~1806년)가 스승인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1713년~1791년)과 합작으로 그린 그림으로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리고, 소나무는 강세황이 그렸다. 소나무의 기상과 호랑이의 위엄이 서로 견주기라도 하는 듯이 상하로 그 위풍이 당당하다. 특히 노송의 거친 나무껍질과 이끼는 오랜 세월을 잘 견뎌낸 대견함이 있고, 힘차게 뻗은 호랑이 털의 위엄은 화폭 전체에서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 소나무 아래 호랑이가 갑자기 무엇인가를 의식한 듯 정면을 향했다. 순간 정지한 자세에서 긴장으로 휘어져 올라간 허리의 정점은 정확히 화폭의 정중앙에 배치되어있다. 위압적인 머리를 내리깔고 앞발은 천근같은 무게로 엇걸었는데 허리와 뒷다리 쪽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금방이라도 보는 이의 머리 위로 펄쩍 뛰어 달려들 것만 같다. 그러나 당당하고 의젓한 몸집에서 우러나는 위엄과 침착성이 굵고 긴 꼬리로 여유롭게 이어지면서 부드럽게 하늘을 향해 굽이친다. 화가는 바늘처럼 가늘고 빳빳한 붓으로 터럭 한 올 한 올을 무려 수천 번을 반복해서 세밀하게 그려냈다.

이렇듯 섬세한 필획을 검정, 갈색, 연갈색, 그리고 배 쪽의 백설처럼 흰 터럭까지 반복해서 그렸지만 전혀 어색함이 없을 뿐더러 묵직한 무게감과 문양은 문양대로, 생명체 특유의 유연한 느낌까지 살아 있다. 극사실 묘법을 썼는데도 범의 육중한 양감이 느껴지고, 호랑이 특유의 민첩 유연함까지 실감나게 표현한 점이 경이롭다. 화면은 상하좌우로 호랑이가 가득하다. 이렇게 꽉 찬 구도덕에 범의 신령스러운 위세가 당당하다. 여백 또한 정교하게 분할되어 범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같은 크기의 공간이 하나도 없다. 정교한 구성으로 완벽한 구도를 보여준다. 김홍도는 조선 최고의 화가로 자신이 남긴 '단원풍속화첩'에 들어 있는 25점의 풍속화 때문에 우리들에게 풍속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원이 남긴 한국화는 풍속화뿐만이 아니라 산수화, 도석인물화, 영모화(화조화, 동물화) 등 거의 모든 회화 영역에서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 고금을 막론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극사실주의(極寫實主義)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 바로 ‘송하맹호도’이다.

어릴 적 계단을 오르내리며 마주쳤던 호랑이의 매섭고 자신감 넘쳤던 그 눈빛이 가끔 교훈처럼 각인이 되었다.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역경을 호시우보(虎視牛步)하는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집에 걸려있던 한 점 그림이 주는 순기능이다. 습관적으로 그림 속 호랑이와 응대하며 그 시절을 보내던 아이가 붓을 들어 종이에 호시탐탐 또 다른 구도를 상상하고 있는 어른이 되기도 한다.

​김홍도·강세황, ‘송하맹호도‘,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90.4x43.8cm,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김홍도·강세황, ‘송하맹호도‘,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90.4x43.8cm,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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