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오해와 편견
시론-오해와 편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09.22 15:3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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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
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오해와 편견

우리의 문화 전통과 풍습에서 까마귀는 해로운 새다. 까마귀 울음소리는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등의 시조 구절은 까마귀의 부정적 이미지를 나타낸다. 물론 뒤의 것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비유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지만, 겉이 검은 것을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은 매한가지다. 반면에 까치는 길조의 대명사로 일컬어져 왔다. 아침에 사립문 밖의 나무에서 까치가 울면 그날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는 것으로 믿었다. ‘까치설날’이라는 동요가 말하듯이 누구나 까치가 마당에 깃들이는 것을 반겼다. 그런데 이 오랜 인식의 모형이 점차 바뀌고 있다.

오늘의 우리 농촌에서 까치는 까치밥을 남겨서 먹일 손님이 아니다. 까치는 대규모 과수 재배 농가에 과일의 상품성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도심의 까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까치는 전봇대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워 정전을 일으키는 흉조(凶鳥) 혹은 해수(害獸) 취급을 받고 있다. 이는 우리 시대의 생활 양상이 과거와 달라지면서 변화한 현상이다. 반면에 까마귀는 해충을 잡아먹는, 농사에 이로운 익조(益鳥)이자 효조(孝鳥)로 신분이 달라지고 있다. 아마도 새카만 외양과 듣기에 불쾌한 울음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서 말미암는 오해와 편견의 사례가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다.

서구, 특히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담론에 있어 까마귀는 매우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는 새다. 헛된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징벌로 수 년 동안 우로(雨露)가 그쳤다. 허기에 지친 선지자 엘리야가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있을 때, 여호와의 전령사인 까마귀가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날랐다. 까마귀는 음식을 가장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새지만 그 본성을 억제하고 맡은 본분을 다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옳다. 어떤 사례, 상황, 관계에 있어서도 한 범주 안에 서로 다른 방향성이 존재할 수 있다. 내가 보기를 원하는 방향, 내 입맛에 맞는 것만을 뒤따를 것이 아니라 사태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진 지 벌써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 나라가 분단되고 100년의 시간이 흐르거나 분단된 양자 간 국민의 평균 신장 차이가 10센티미터 이상이 되면 다시 통합하기 어렵다는 속설이 있다. 베네룩스 삼국은 원래 한 나라였으나 한 세기를 넘기면서 완전히 남남이 되고 말았다. 이제 겨우 한 세대의 시간을 남기고 있는 남북 간의 균열은 언어의 이질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북한에서는 우리가 아는 오징어를 오징어라 부르지 않고 놀랍게도 낙지라고 한다. 반면에 오징어는, <조선말대사전>에서 ‘몸통이 닭알 모양이고 좀 납작한 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닭알을 달걀이고, 사전의 안내를 따르면 북한의 오징어는 우리가 말하는 갑오징어다.

이러한 사례들이 중첩되고 축적되면 마침내 언어이질화를 되돌리기 어려워진다. 아무튼 서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교란이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 것이고 보면, 국토의 통일이 요원한 터에 언어문화의 통합이라도 서둘러야 할 일이다. 북한의 특사로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이, ‘오징어와 낙지의 차이부터 통일 해야겠다’고 한 적도 있다. 우리 삶의 도처에 이처럼 동일한 대상을 놓고 각기 다른 시각을 적용하는 경우가 즐비하다. 정말 올곧은 것은 무엇일까, 떠도는 풍문이나 거짓으로 호도된 것이 아닌 진실은 무엇일까를 찾는 사람이 너무도 귀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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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선 2019-09-25 10:22:20
김종회평론가선생님의 칼럼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린지가 어언 70년이 흘렀습니다. 100년이란 오랜세월이 지난다거나 양자의 신장차이가 생긴다면 하나되기가 어렵다는 말씀에 가슴이 쿨합니다. 정말 동감합니다. 이러다가 우리나라도 베네룩 삼국처럼 되어버리지 않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벨기에, 네델란드 룩샘부르크, 세나라를 합쳐도 조그만한데 같은 나라였다가 영원히 분단되는 비그극을 맞은 것처럼 우리나라도 걱정입니다.

벌써 4~5년 전인가요. 이병주문학관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아랫마을 숙소에서 술잔을 나누며 밤새도록 우리나라 문학이 나아가야할 이얘기 저얘기로 밤을 새던 때가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