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우리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
시론-우리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0.06 15:4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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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
김종회/문학평론가·박경리 토지학회 회장-우리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

동양문화권, 특히 한문문화권에서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저술 가운데에는 중국의 4대 기서(奇書)를 빼어놓을 수 없다. 이른바 <삼국지연의>,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가 그 제목들인데 이 중 <삼국지연의>에는 30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위·오·촉한 등 3국시대의 파란만장한 사회상과 처세철학을 수놓고 있다. 여기서 더 범위가 확장된 중국 역사가 <열국지>다. 거기에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와 걸출한 인품의 주인공들이 처처에 모래밭의 사금처럼 널려 있다. <열국지>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춘추5패의 한 사람인 초나라 장왕의 이야기다.

어느 날 장왕이 신하들을 데리고 밤중에 촛불을 휘황하게 밝힌 다음 연회를 베풀었다. 그 중도에 느닷없이 일진광풍이 불어 불을 모두 꺼버렸다. 온 주석이 어둠에 잠겼다. 그러자 신하 한 사람이 술기운으로 장왕이 총애하는 애첩의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신하의 갓끈을 뜯어 쥐고서 어서 불을 밝혀 갓끈의 임자를 찾으라고, 자신의 지혜와 정절을 자랑했다. 장왕은 불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에 모든 신하들로 하여금 스스로 갓끈을 뜯어버리게 했다. 취중의 사소한 실수로 치부하고, 색출할 수도 있는 범인을 즉석에서 사면한 셈이다.

많은 나날이 지난 다음 장왕이 전쟁터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어 죽을 고비에 이르렀다. 한 사람의 장수가 목숨을 내던져 장왕을 구출하고는 부상으로 숨지게 되었다. 장왕이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그대의 생명으로 나를 구했는가?”, “왕이시여, 제가 바로 옛날의 연회 때에 갓끈을 빼앗겼던 자입니다. 그 은혜를 이제야 갚습니다”그리고 그는 죽었다. 남을 용납할 만한 도량을 금도(襟度)라 부르는데, 역사는 장왕의 금도를 실증한 그날의 연회를, 끊을 ‘절’, 갓끈 ‘영’자를 써서 절영연회(絶纓宴會)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남을 용서하는 일에 훈련되어 있지 못하다. 자신의 큰 잘못은 쉽게 용서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에 석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보면,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성경의 비유가 뼈아픈 채찍이 아닐 수 없다. 참된 용서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땅에 함께 살아가는 갑남을녀(甲男乙女)들이 이 논리적인 용서의 방식을 체현하고 실천하기란 실로 만만한 것이 아니다. 참된 용서를 실천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개인에게나 공동체에게나 매한가지인 것 같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극명하게 두 동강으로 갈라놓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 또한 상대방 진영을 이해하거나 용서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발생한 비극이다. 보수에도 건전한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진보 역시 그렇다. 한 나라가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질서와 국량(局量)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의 건전한 경향이 서로를 용납하고 손을 맞잡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정치가 그만한 역량의 전개를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소나 말의 정치다.

포용의 미덕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가는 정치 지도자나 집단은 후세의 사필을 두려워해야 한다. 민족이나 국가의 앞날은 안중에도 없고 정치적 정파적 이익만 앞세우는 행태에서, 무슨 공동체의 내일을 일구어 나갈 정치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내 편이 아니더라도 그 말과 형편에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대승적으로 한 발 물러서서 아량과 용서를 베푸는 큰마음의 정치인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게서 ‘선한 정치란 백성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란 상식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공동체를 운위하기에 앞서 우리 개인의 심정을 성찰해 보자. 우리가 과연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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