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
칼럼-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0.14 14:1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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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

기꺼이 고생을 감당하는 사람은 인생의 전반기에 고생하고, 고생을 감당하려 들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후반기에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나폴레옹(1769∼1821) 아버지는 가난한 코르시카의 귀족이었지만 가난을 면치 못하는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나폴레옹을 브리엔의 귀족학교에 보냈는데,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모두 그의 앞에서 부유함을 뽐내며 그의 가난을 조롱했다. 그들의 안하무인격인 놀림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폴레옹으로서는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5년이나 이곳에서 공부하며 괴로움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 이 외국 아이들의 조롱을 견디기가 무척이나 힘들어요. 우리 집의 가난한 형편을 해명하느라 저는 지쳤어요. 그들이 저보다 나은 것이라곤 돈밖에 없어요. 고상한 사상이라면 그들은 제 발끝도 따라오지 못해요. 부유하고 오만한 사람들 속에서 이렇게 굴욕만 당해야 하나요? 이런 시간을 몇 년이나 더 견뎌야 하나요? 아버지 학교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아버지는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우리는 확실히 가난하다. 만일 네가 평생 저들에게 이런 조롱을 받기를 원치 않는다면 반드시 그곳에서 견디면서 공부해야한다’그렇다! 5년을 견딜 것이냐? 아니면 평생을 견딜 것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나폴레옹이 선택한 것은 5년을 견디는 것이었다. 그는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5년 동안 그는 모든 것을 견뎌냈다. 계속되는 조롱, 굴욕, 무시가 그의 성공을 향한 결심을 굳건하게 만들었다.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생각했다. 나 나폴레옹은 이 머리 없고 오만한 자들을 발판 삼아 훗날 명예와 지위를 꼭 달성하리라 결심했다.

나폴레옹은 하급군관으로 군에 들어갔다. 동료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여자와 도박에 빠져 지냈지만, 나폴레옹은 작은 체구 때문에 여자들의 관심조차 받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이 향락과 도박을 즐기는 시간에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돈이 없어서 책을 사 볼 수 없어 도서관을 이용했다. 그가 집중적으로 파고 든 책은 미래에 이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이었다. 전공 서적은 물론 계몽사상가에 관한 책들도 탐독하다가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1712∼1778)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자신이 총 사령관이 되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코르시카 섬의 지도를 그려놓고는 수학적 지식을 동원해 어느 곳에 방어 기지가 있어야 할지를 그려보기도 했다. 이런 공부를 하다 보니 수학에 관한 실력이 향상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학구적 열성을 관심 있게 눈여겨본 상사가 훈련장에서 복잡한 계산력이 필요한 업무를 그에게 시험 삼아 맡겨보았다. 그때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의 기회도 얻었다. 그를 조롱하던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친구가 되기를 원했고, 면전에서 그를 비웃던 사람들도 그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를 기반으로 35세에 황제로 추대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명나라 재상 장거정(張居正 1712∼1778)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났다. 13세 때 처음으로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시험관 진속(陳束)에게 크게 칭찬을 받고 합격자 명단에 뽑혔다. 이때 마침 순찰 나온 호광순무(湖廣巡撫) 고린(顧磷)에게 진속이 장거정의 답안지를 보여주었다. 고린이 이를 보고 ‘기이한 인재’라며 감탄해 마지않더니 장차 틀림없이 나라의 동량(棟樑)이 될 것이라 말했다. 그러고는 진속에게 장거정을 낙방시키라고 했다. 진속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라의 동량이 될 사람을 어찌 낙방시키라고 하는가? 고린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면 오만해져 더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먼저 그가 좌절을 겪으며 성정을 단련하게 하고, 때가 되면 등용해야 한다.”라고 설명을 하면서 장거정을 낙방시켰다. 장거정은 그 후 더욱 분발하여 3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치른 시험에서 합격했다. 수년 후 재상의 자리에 오른 장거정은 개혁을 주도하여 명나라 중흥에 크게 기여했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어느 장관 부부가 고교생 딸을 논문1저자로 만들어주고, 표창장까지 위조하여 만들어줬다는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답답하여 한 번 되새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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