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군중정치
아침을열며-군중정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0.14 16:1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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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선거연수원 초빙교수·역학연구가
이준/선거연수원 초빙교수·역학연구가-군중정치

수컷 짐승은 기존의 다른 수컷 짐승을 물리치고 영토, 암컷, 먹이를 오롯이 차지한다. 암컷은 성적 교태를 부리며 기존의 수컷을 낡은 폐물로서 내팽개치고 새로운 강자를 맞이한다. 수컷은 스스로 동작하는 것 같으나 실은 적자적(適者的) 자기 생존과 보다 강한 종족번식을 위한 암컷의 페르몬 효과에 걸려든 것이다.

수컷은 경쟁이 되는 다른 수컷들과 기존 수컷들의 새끼들을 영역 밖으로 쫓아내거나 하나하나 잔인하게 물어뜯어 죽인다. 짐승의 영역에서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처절한 숙명이 관찰된다. 하지만 새 강자인 수컷의 지배 기간도 오래가지 못한다. 새로운 수컷이 금방 또다시 자라나 도전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적 신성(神性)과 동물로서의 속성을 아울러 가진 존재로 일컬어진다. 사람이 짐승 아닌 사람으로 더 나아지기 위하여 동물로서의 본능을 지양(止揚)하고, 신성을 지향(指向)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으로서 본능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자기규제를 할 줄 아는 것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성을 자각한 사람은 자기 내면의 자기 신성을 계속하여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동물적 본능에만 충실한 사람도 외부의 자극이나 교육을 통하여 내면의 야수성을 승화시켜 신성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절절이 호소한다. 이것이 사람의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꼭 그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홀로 개인적일 때는 영적 신성을 자각하여 매우 순수하던 사람이 일정한 조건만 주어지면 너나없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야수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신성은 야수성을 둘러싼 얇디얇은 허울에 지나지 않음을 말해준다. 오히려 이들은 본래 야수성이야말로 물들지 않은 순수한 자연이라 외치기도 한다. 이들은 특수한 조건과 명분만 갖춰지면 물 만난 고기 마냥 더더욱 잔인하고 흉포하고 교활한 면모(面貌)를 그지없이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그 조건이란 군중(群衆)을 말한다. 미움과 증오감에 사로잡힌 일시적 떼거리, 의기투합한 패거리, 조직화된 집단 등이다. 이 군중이 권력의 속성을 띄게 될 때 자기 집단의 상대적 우월의식에 도취(陶醉)되어 적개심, 상대를 박멸(撲滅)시켜 버리려는 적대적 증오감은 극대화된다. 드러나는 것은 끔찍한 전쟁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바람직하고 합리적이며 존경심을 넘어 무지무지하게 숭배하고 싶은 마음조차 일어나는 개개의 국회의원도 막상 정당 구성원이라는 패거리 속에만 들어가면 참으로 하찮은 존재로 변해 버리는 안타까운 상황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깨어있는 지성이 요구된다. 괴물이 될 것인가, 순결한 속죄양이 될 것인가. 군중을 맑고 밝은 곳으로 이끄는 예지자가 될 것인가, 미망과 실종으로 이끄는 피리부는 소년이 될 것인가.

물론 무리는 개체가 할 수 없는 무한한 시너지(synergy) 효과를 창출하기도 한다. 예컨대 한 개체로서는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수 천리 먼 곳으로 날아다니는 철새나, 수만리를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 떼나, 대륙을 휘저어 다니는 동물무리들이 그 보기다.

하기에 군중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집약된 군중 에너지를 승화시키는 노력을 강조해야 한다. 하지만 대의제와 시스템에 참여하는 거버넌스와 군중의 직접 참여의 동일성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따라서 시스템이 가동되지 않거나 개혁이 불가능하다면 어설픈 명분을 집적거리지 말고 차라리 18세기로 돌아가 혁명을 일으키라. 그게 더 솔직하다.

군중은 축제의 장에서는 아름답다. 재밌는 스포츠 경기도 적대적 감정이 더욱 크게 뒤섞일 때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난동으로 귀결되지 않던가. 하물며 적대적 감정이 들끓는 권력투쟁의 장에 있었으랴.

위대한 정치가들은 군중을 덕화(德化)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지만, 천박하고 잔인한 선동꾼들은 적대적 증오감만 부추긴다. 민심이 갈라지면 사회공동체는 붕괴되고 나라는 반드시 패망한다. 자기 패거리는 득세할지 모르나 결국 끼리끼리의 정치가 되어 공멸로 전락한다. 많은 역사적 사례가 웅변한다.

광화문과 서초동의 군중은 희망인가 재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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