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시인 안도현
아침을 열며-시인 안도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0.22 16:2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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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강영/소설가-시인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어/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를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안도현 시인의 <가을의 소원>이란 시 전문이다. 아들이 하는 북카페의 이달의 시로 선정되어 읽는 연이 되었다. 가을이다. 그래, 가을인 것이다. 뭐라 뭐라 말하기도 뭐한 가을이다.

갑자기 유리처럼 쨍한 가을 해의 빛깔 아래 서면 뭐라 말을 할 수도 그렇다고 종알종알 지껄이기도 뭐하다. 버겁고 감사한 심경밖에 아무것도 일없어진다 그 말이다. 정직하고 맑은 햇살 아래 떨어져 구르는 갈잎들은 또 얼마나 보기가 아프든지. 바람이라도 후욱, 불어와 그 가랑잎 날려 보내는 걸 어쩌다 봐 버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버리면 괜스레 시인이 아니라도 눈물이 고이는 것이다. 때에 <가을의 소원>을 만났다.

나락이 익어가는 가을 들녘에 서버린 저녁 무렵, 가슴속으로 후드득 소나기가 몰려든다. 사방은 고요해서 멀리 들리는 자동차 소리마저 안타까울 지경.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주면 아아, 입을 크게 벌려 마주 바라본다. 시인은 궁금한 게 없다고 했으나 새끼낳은 아녀자는 저녁엔 호박잎을 뜯어 넣고 된장국을 끓여 식구들 먹일 생각이 머릿속으로 스며들기 마련이다. 서리 오기 전 논두렁 밭두렁에 흔하니. 호박잎은 초록도 맛도 애틋하다.

논두렁 밭두렁에 더러 애틋한 걸 발견한다 해도 그것이 가을길을 걷는 까닭이 될 수는 없을 것. 그냥 게으르게 마냥 걷노라면 고맙다, 고맙다, 것도 내 마음 안으로 안으로 그리할 뿐이다. 어떻게 시인들은 저다지 사람 마음을 잘 아는지.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은 것’이 가을철 소원의 으뜸이리라. 여름에 논두렁풀을 쳐보았는가. 돌아서면 또 퍼렇게 욱어 있잖은가! 그 모진 생명력이라니. 이제 가을이니 안으로만 물기를 말리리라.

아아 시인은 가을엔 ‘혼자 우는 것’이라고 엄중하게 일러주신다. 징징징 여기저기 다니며 칭얼대며 어리광 피우지 말고 혼자서 울어라고 하신다. 구태여 가을 아니라도 혼자 울 일 많은 세상이니 그래서 더욱 가을을 맞아 또 혼자 울 일이다. 제대로 하자면 일일이 찾아서 만나서 사죄해야 되겠지만 상처 준 사람들에게 마음으로라도 깊이 사죄해야 될 것이다. 은혜 진 사람들에겐 적으나마 갚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리 위대한 가을이니까.

내일이나 모래나 혹독한 겨울이 확 닥쳐올 것이었다. 진눈개비 휘날리면 사는 건 또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시인은 초록을 그리워하지 말라고 잔인하도록 경고하지만 날 풀리고 새싹 돋는 봄날이 또한 얼마나 그리울 것인가. 뙤약볕 아래 열심히 일하고 소나기 땀이 등짝에 소금 꽃을 피우면 웃통을 훨훨 벗어던지고 찬물을 끼얹을 걸 얼마나 갈망할 것인가 말이다. 시인이여, 너무 걱정하지는 마셔요. 그리워도 혼자 울기 또한 우리의 주특기인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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