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판소리(唱劇)가 걸어온 길
진주성-판소리(唱劇)가 걸어온 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0.31 16:31
  •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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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판소리(唱劇)가 걸어온 길

창(唱)을 위주로 하며 극적인 대사를 약간의 동작을 가미하면서 꾸며나가는 일종의 민속극 대부분 독창 형식의 판소리를 위주로 한 극이므로 연극적 요소를 다소 가미하고 있으나 동작이 결여된 오페라이다. 창극의 연원은 신라시대 화랑으로부터 찾을 수 있으나 그 효시는 숙종이후 영, 정조 사이의 하환담과 최선달로부터 시작되어 권삼득을 거쳐 순조때의 신재호에 이르러 확립을 보게 되었다. 영‧정시대부터 발생된 창극에 힘입어 싹이 튼 창극이 신재효에 이르러 춘향가 심청전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루귀타령 적벽가등 재래의 소설을 창극조로 개찬 윤색하고 많은 광대를 길러냄으로써 일대 반전을 가져왔다.

이로부터 광대들은 창극화된 극본을 부르게 되었으니 일정한 극장이 없이 궁정이나 고관 부잣집의 잔치등에 초대되어 가서 간단한 동작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간간이 대화를 섞어 극적 효과를 나타낼 뿐이었다.

이렇듯 극장을 갖지 못한 채 100여 년 동안이나 내려오다가 광무년간(光武年間)에 원각사의 건립과 함께 융희황제의 특명으로 남녀창우 270여명의 진용으로 그들을 통솔하는 가무도감을 두어 그때 까지 단창(單唱)의 형식에 불과하던 것이 대규모의 인원으로 상연케 되기에 이르렀다. 판소리는 중부이남의 지방에서 발달되었고 이를 부르는 광대들도 대부분 전라도의 무인계급 출신들이 이를 전업으로 삼아 왔으며 원래는 단창에 다만 고수(鼓手) 1명만으로서 신재효 이후 근 100여 년 동안이나 연창되었던 것이 광무 연간에 궁내부 직할인 국립극장 원각사가 건립되어 상연되면서부터 여러 사람에 의한 창극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원각사가 신극 전용관이 되자 이들은 협률사를 조직하여 지방 순업을 하였고 1912년에 극장 광무대가 신축되자 창극의 상연을 하게 되었다. 1920년에는 극단 광월단이 1930년에는 극단 연예단이 활동하였고 1933년에는 전국적인 일류명창을 망라하여 성악연구회를 창립하여 신인 육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1936년에 산하에 극단 창극좌를 두어 동양극장 무대를 통하여 매우 활발한 창극운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동일창극단을 통하여 앞으로 진로를 밝히고 대국민을 위하여 봉사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1939년 동일창극단이 지방에서 조직되었고 1942년 창극파에서 분리된 화합이 다시 합동하여 조선창극단을 조직하여 창극상연의 활기를 띠었다.

해방후 국극으로서 민족오페라의 수립을 지향하며 창극이 창시된지 200여년 생존한 남녀 명창 100여명이 면면히 창극의 발전을 위하여 활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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