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백지를 위하여
아침을 열며-백지를 위하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1.05 16:12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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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강영/소설가-백지를 위하여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엔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이상의 소설 ‘날개’의 도입부분이다. 처음 이 문장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아직도 이 일곱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이다.

박제가 된 천재나 유쾌하지 않은 연애부터 우선 읽는 순간 퍽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박제가 된 천재는 이미 천재가 못 되며 참 슬픈 모습이다. 그런데 나에게 그 슬픈 꼴을 한 사람을 아는지 묻는다. 마치 ‘네가 00을 알아?’하듯 냉소적으로 묻는다. 이건 자기는 잘 안다는 뜻이며 바로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만 같다. 처음 이 물음을 당하고 얼마나 그 슬픈 천재가 당기던지!

20대 초반이었으니까 아마도 근원적으로 슬픈 자아에 대한 나름의 객기도 있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문장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지까지 유쾌하오’는 또 어떤가? 결국 그는 절대로 유쾌하지 않으며 연애는 더더욱 유쾌하지 못하다는 절규 아닌가 말이다. 내 20대 초반 무렵이 신군부 전두한 정권시절이었고 나는 가난한 공장노동자였으니 뭐가 그리 유쾌했을 것인가. 연애? 가난하고 못생기고 무지하기까지 한 내게 연애는 이상일 뿐.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다 두고 정신이 은화처럼 맑다고 한 말에서 이상한 위로를 느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격언과 함께 나를 무턱대고 격려하던 것이다. 또한 그 지독한 일제치하의 지식인이 정신만이라도 은화처럼 맑게 간직한 게 고마웠다. 우리도 지금껏 몸이야 이런저런 일로 만신창이가 되어도 믿을 건 마음 하나밖에 없다.

실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어지는 ‘니코틴’에 있다. 횟배 앓는 뱃속으로 니코틴이 스며드는 걸 스스로 체험하기 위해 담배를 피우기로 한 것. 그래서 머릿속에 백지를 가지고 싶었다. 이미 내 나이는 20대 초반에서 후반이었다. 백지를 갖고 싶은 마음도 그 만큼 굳어졌겠다. 은화처럼 맑은 정신이 생산한 새하얀 백지를 말대로 미치도록 홀로 갈망했다, 백지를 말이다! 퇴근길에 난생 처음으로 담배를 한 갑 사서 자취방에 돌아왔다.

담배 연기를 목구멍에 들여보내기 위해 천천히 담배를 물고 숨을 들이마셨다. 웬걸, 담배연기는 기도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것이 기도를 통과하고 폐 속 깊이 스며들어야 머릿속에 백지가 준비되든지 말든지 할 것인데 그것은 입안에서만 머물며 쓰고 역한 냄새만 눈과 코를 자극했다. 그래도 새벽까지 백지를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방안엔 담배연기로 가득하고 포기하자고 마음먹고 마지막으로 불을 댕겼는데,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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