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훈 주필의 신인물기행-고성향토문화선양회 박서영 회장
강남훈 주필의 신인물기행-고성향토문화선양회 박서영 회장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1.06 18:21
  •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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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 ‘월이’ 애국정신 알리고 문화 콘텐츠화 할 것”
▲ 고성향토문화선양회 박서영 회장은 “의기 ‘월이’를 통해 고향 고성이 자랑스러운 문화의 고장으로 우뚝 서고, 우리나라 문화 융성에 작은 씨앗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연히 월이 소설 읽고 관심 본격 연구 시작

2016년 선양회 출범…학술회·체험 등 활동
‘월이 축제’ 고성 역사·문화 홍보역할 톡톡
내년 월이 관련 종합자료집 발간 추진 계획


경남 고성에서는 매년 ‘월이(月伊)’를 기리는 다양한 축제가 열린다. 올해도 지난 10월 25~26일 이틀 동안 고성군 고성읍 고성군민체육센터에서 ‘제2회 월이 축제’가 열렸다. 월이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이순신 장군이 고성 당항포 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데 크게 기여한 의기(義妓)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구전으로 전해오는 설화나 고성의 지명 전설, 각종 자료 등을 미뤄볼 때 기녀 월이의 당항포 대첩 활약상은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400여년이 흐른 뒤 그동안 역사의 베일 속에 감추어져 있던 월이가 세상 밖으로 나서게 된 것은 ‘고성향토문화선양회(이하 선양회)’의 활동 덕분. 선양회 박서영 회장(68)을 만나 기생 월이와 월이 축제에 대한 이야기 등을 들어봤다. 박 회장은 그동안 축제 준비로 다소 지친 모습이었지만, “월이의 애국충렬 정신을 되살리고, 고성은 물론 앞으로 우리나라 전체의 문화 콘텐츠로 키워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월이 축제를 기획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임진왜란이라는 국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고성이 낳은 ‘월이’라는 기생에 대한 구전설화는 임란 후 420여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왜(일본)가 조선반도에 대한 침략계획을 세우면서부터 조선반도의 지형지물에 관한 사전 정탐은 당연한 수순이었겠지요. 특히 배를 타고 와야 하는 섬나라 일본으로서는 조선의 남해안에 대한 자세한 지도 작성은 전쟁준비의 필수적인 요건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이 과정에서 일본인 첩자의 바랑을 몰래 열어 고성 해안지역 지도를 바꾼 월이의 용기 있는 행위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사실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수군이 고성 당항포 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월이의 이 ‘지도 변조’ 행위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요.

지난 10월 26일 고성군민체육센터에서 제2회 월이 축제 ‘월이예능선발대회’를 개최했다.
지난 10월 26일 고성군민체육센터에서 제2회 월이 축제 ‘월이예능선발대회’를 개최했다.

-그럼, 월이에 대한 얘기는 많이 전해 내려오는지요?
▲월이 구전 설화와 함께 고성지역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쏙싯개(일본 수군이 속았다고)’, ‘두호리(전사한 일본 수군의 머리가 떠내려 왔다고)’, ‘도망개(전함이 격파되자 일본수군이 산 쪽으로 도망쳤다고)’ 등의 지명 전설도 이 구전설화를 뒷받침 하고 있지요. 이처럼 월이에 대한 얘기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데도 그동안 이에 대한 우리의 노력은 많이 부족했습니다. 고성군청이나 고성문화원 등에서도 월이 구전에 대한 자료수집이나 책자편찬 등이 있었으나 일관성은 찾기 어렵고 월이를 주제로 한 연극, 인형극 공연, 시와 소설 등이 발표되었으나 대부분 그때그때 단발성에 그쳐 왔습니다.

-월이를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선양회의 1차적 기본 활동의 중심주제는 ‘월이 선양’과 ‘월이 정신’ 구현입니다. 선양회가 2년 전인 2017년 제1회 월이 축제를 기획·개최 한 것이나 올해 제2회 월이 축제를 열게 된 것도 이 같은 노력의 일환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월이를 실존 인물로 봐야겠습니다

▲월이 뿐 아니라 월이와 비슷한 신분을 가졌던, 더군다나 여성의 활동이나 역할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나 사료는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에 대한 기록은 아예 처음부터 작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월이에 관한 자료라야 100% 구전설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월이 구전의 핵심은 일본 첩자의 지도를 붓으로 변조해 ‘소소포’(지금의 고성천)로 불렸던 바다와 인접한 고성만 바다를 이어 뭍을 바닷길로 바꿈으로서 당항포 대첩에서 이 지도를 전도(戰圖)로 삼은 일본 수군들이 큰 혼란에 빠지게 만든 역할을 한 의기이지요. 월이를 주제로 몇 편의 소설이 이미 발간되어졌고, 연구논문도 다수 나와 있습니다만 소설이나 논문에 따라 생애나 행적 등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월이라는 이름으로 고성 ‘무기정’이라는 곳에서 기생의 신분으로 살았다는 부분과 임진란 당시 지도변조 사실이 탄로나 꽃다운 젊은 나이에 왜군에 의해 처형당한 내용 등은 대체로 일치되는 것 같습니다.

박 회장은 고성에서 태어나 초, 중, 고교와 대학 졸업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그 후 부친(작고)이 계시던 일본 나고야, 오오사카 등에서 23여년, 잠시 영국 브라이튼을 거쳐 몽골 울란바트로에서 대학 학과장을 맡는 등 기나긴 해외 생활 끝에 9년 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새로 시작하는 한국생활은 낯설고 막막했다. 그러다 처음 만난 것이 재경고성향우회였다. 새삼 고향 고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됐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고성의 한 작가가 쓴 ‘월이’의 일생에 대한 소설을 읽게 되었다. 진주에 ‘논개’가 있듯이 임진란 당시 고성에 월이라는 의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때부터 월이에 대한 자료를 닥치는 대로 모으고 읽었다. 구전설화, 사료, 문학작품, 연극 대본 등을 접하면서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점점 구체화 되어 갔다. 처음에는 월이 설화의 영화화 등도 생각했지만, ‘이게 아니다!’ 싶어 차근차근 바탕 돌부터 놓아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서울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뜻이 통하는 향우(鄕友)들과 선양회를 만들고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

-지난달에 열린 월이 축제가 두 번째죠? 그동안 선양회 활동 사항을 소개해 주시죠
▲2017년 첫 축제가 열린지 2년만이지요. 제1회 월이 축제에서는 ‘월이둘레길 걷기 행사’를 시작으로 월이 목각과 글씨를 포함한 각종 작품전시회, 시화전 등이 열렸습니다만 행사의 백미는 단연 6막으로 구성된 ‘월이춤’의 초연 발표였습니다. 한국전통무용 연구와 함께 스스로 무용인으로서 무대에 선 구영미 교수의 안무지도로 고성·진주·사천 문화원 회원들의 피땀이 얼룩진 ‘월이춤’은 많은 군민들의 뜨거운 호응과 감동을 끌어냈습니다. 선양회는 2016년 ‘고성의 아름다운 길’ 제하의 달력을 시작으로 매년 월이와 고성의 문화·역사·인물을 주제로 새해달력을 제작·배포해 오고 있습니다. 2016년 ‘월이 초혼제’를 열어 400여 년 동안 잠자고 있던 혼백을 모셔왔고, 월이의 붓끝이 바다 물길을 바꾼 역사의 현장인 고성 마암면 간사지와 고성천 주변의 ‘월이둘레길 걷기’는 올해로 7번째를 맞게 되었습니다. 고성의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습니다. 2017년과 2018년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된 ‘월이 학술 세미나’는 월이 설화의 역사적·학술적 탐구와 함께 소중한 연구자료 축적이라는 수확을 얻었습니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전국에 걸쳐 실시한 창작판소리 ‘월이가’ 공모도 의미 있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지난 10월 25일 열린 ‘제7차 월이 둘레길 걷기’ 행사 모습.
지난 10월 25일 열린 ‘제7차 월이 둘레길 걷기’ 행사 모습.

-올해 제2회 월이 축제도 아주 성공적이었습니까?
▲지난 10월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열렸습니다. 첫날인 25일 오후에는 ‘제7차 월이 둘레길 걷기’ 행사가 고성군 마암면 간사지 주변 ‘월이길’에서 펼쳐졌습니다. 고성군교육지원청의 전폭적인 협조와 지원으로 200여명의 군내 학생들과 지도교사, 그리고 고성군민이 함께 참여해 가을 갈대가 우거진 고성천변 길을 걸으며 월이의 애국·충렬 정신을 되새기는 역사체험을 했습니다. 이어 26일 축제 본 행사장인 군민체육센터에서는 하루 종일 다양한 축제행사가 어우러졌습니다. ‘채색도자기 월이인형 전시회’는 많은 축제 참석자들의 관심과 눈길을 모았습니다. 선양회가 국내 최고의 채색도자기인형 연구소인 서울 인사동 ‘오주현도자기연구소’와 함께 2년여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55점의 월이 도자기상이 한 자리에서 첫 선을 보이는 전시회였습니다. 60여점의 월이 시화작품이 내걸린 축제장 안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제1회 월이예능선발대회’가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예선과정을 거친 음악, 춤, 악기 등 예능이 빼어난 청소년들이 겨루는 본선무대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습니다. 이날 심사를 거쳐 성인부에서 월이대상(김지노), 호국상(윤재영), 지혜상(김혜선), 풍요상(안소예)을 수상한 ‘대표 월이’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부에서는 해님월이(권미조), 달님월이(박진아), 별님월이(김도연)가 뽑혀 앞으로 ‘월이정신’을 널리 알리는 것은 물론 고성문화의 홍보대사 역할까지 톡톡히 해낼 것으로 기대됩니다.

-월이의 역사적 가치는 무엇이며, 고성군민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요?
▲400여년 긴 세월을 통해 고성지역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월이 설화’는 수년 간 고성향토문화선양회의 부단한 노력으로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나 이제 역사의 광장에 제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 기생이라는 하층민에 대한, 더구나 여성이라는 신분 때문에 역사의 기록에서 홀대와 무시를 당해오던 월이의 쾌거가 이제야 조금씩 조명을 받게 된 셈이지요. 월이의 지혜와 용기 있는 행동은 머지않아 어김없이 제대로 된 역사의 평가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갈수록 희미해지는 우리 청소년들의 역사의식에 월이의 애국충렬 정신은 하나의 귀감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듭니다. 매우 고무적인 것은 고성 군민들의 ‘월이 설화’에 대한 관심이 놀랄 만큼 빠르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월이’를 아예 모르거나 막연히 들어 본 정도의 사람들도 많아 훨씬 더 많은 노력과 홍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엉뚱한 질문입니다만, 월이가 진주의 논개처럼 될 수 있을까요?
▲역사적 인물이나 그 행적을 두고 서로 비교하거나 우열(?)을 가리는 일이야 해서도, 있어서도 안 되겠지요. 그러나 고성의 의기 월이는 진주의 논개 못지않게 그 역사적 의미나 무게가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아직 ‘월이’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구체적 사료 발굴이나 입증을 위한 학계나 기관들의 노력이 많이 부족했던 게 사실입니다. 선양회가 ‘월이학술세미나’를 계속해 개최하는 것도 지금까지 연구부족을 뒤늦게나마 보충, 보완해 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앞으로 더 노력한다면,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고성향토문화선양회는 지난 2015년 준비기간을 거쳐 이듬해인 2016년 초 창립총회와 함께 출범, 지난 3년여 동안 다양한 활동을 펼쳐 왔다. 박 회장은 “선양회는 지금까지 해 오듯이 당분간은 월이에 대한 연구나 관심 제고, 그리고 선양 등에 집중해 나갈 것”이라며 “특히 그동안 단편적으로 발표되거나 흩어져 있는 월이 관련 각종 자료와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묶고 집대성하는 종합자료집 발간은 당장 내년사업에 넣어 서둘러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월이를 기념하기 위한 월이 출생지 근처의 월이 사당이나 기념관 건립, 고성천 주변의 ‘월이둘레길’ 명명과 ‘월이공원’ 조성 건의, 월이 조각상 건립과 월이 웰빙마을 세우기 등도 중·장기 사업에 넣어두고 있다. 월이를 주제로 하는 연극, 뮤지컬, 영화, 드라마 제작 등도 언젠가는 꼭 이루어 보려고 마음먹고 있다.

박 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선양회를 출범시킨 뒤 지난 수년 동안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과 함께 크고 작은 일을 해 오면서 재원 마련 등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면서 “고향 고성이 자랑스러운 문화의 고장으로 우뚝 서고, 나아가 선양회가 우리나라 문화 융성에 작은 씨앗역할이라도 하게 된다면 이보다 더한 삶의 의미가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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