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왕의 별궁 낙선재(樂善齋)
진주성-왕의 별궁 낙선재(樂善齋)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1.07 16:0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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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
윤기식/진주문화원 회원-왕의 별궁 낙선재(樂善齋)

조선24대왕 헌종(憲宗) 1827(순조27)-1849 재위 1834-1849 순조의 손자 어머니는 신정왕후 풍양 조씨 8세에 즉위하자 순원왕후 안동김씨(순조의 비)가 수렴청정 하여 정권은 외척 안동김씨의 손에 있었다.

1839년(헌종5) 천주교를 탄압 기해사옥(己亥邪獄)이 있었고 1840(헌종6) 수렴청정이 거두어 지자 풍양 조씨가 세도를 잡았으니 재위15년 동안 정권을 외척의 손에서 놀았다. 후서가 없으며 능은 경능이다. 19세의 헌종은 아름다웠고 우아한 기품을 지닌 왕이었다. 효정왕후가 간택되던 날 헌종은 3간택에 올랐던 3명의 후보 중 김 씨를 내심 마음에 두었다.

그러나 조정의 여러 세력들은 배후에서 효정왕후 홍 씨를 최종 간택하였고 마지막 간택에서 탈락한 김 씨는 그날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사가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3년여의 세월이 흘렸으나 중전이 된 홍 씨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이를 빌미로 후궁을 간택하여 입궁시키니 그이가 바로 경빈 김 씨인 것이다.

헌종의 길고 긴 연모의 정이 기어이 자신의 곁으로 김 씨를 불러들였다. 후궁의 첩지를 받아 입궁하는 김 씨의 위계가 정1품 빈 이였다. 선택된 경빈은 헌종 13년 입궁 그해 9월에는 이미 낙선재(樂善齋)의 영건 역사가 끝나가고 다음해 석복현과 수강재가 완성 현종이 2년밖에 함께 살지 못한 석복현이지만 그녀가 글을 좋아해 언문소설을 수집해 주었고 헌종의 세심한 덕에 경빈은 2년여의 세월을 무료함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낙선재 조성 목적은 헌종의 뒤를 이을 후사를 보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을 경빈은 헌종을 만나고 생활할 수 있는 공간 그러나 끝내 헌종은 후사를 보지 못하고 승하하고 말았다.

석복현의 상량문‘후왕이 내조의 공을 받으니 하늘이 두터운 복을 받게 하였네/ 돌아보건데 지금의 금슬이 자리에 있고 꾸민 비녀 귀걸이로 경계하도다/ 아침에 늦지않게 깨워 안일을 경계하고 후비의 덕으로 번창한 자손을 칭송하는 화평한 노래 울려 퍼지네/ 오색 무지개 기둥을 감도니 상서를 내릴 약속이로다/ 하늘이 장차 난실에 계시를 하려는데 대인이 점을 치니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였고/ 그중에선 먼저 의심초를 얻는 것이 좋다네/ 궁궐에 있으면서 왕을 받들어 시중드는 일에 아낌이 없고/ 아침저녁 어버이에 문안드리기를 거르지 않도다/ 이에 수강재 오른쪽에 터를 잡고 동쪽에 연이였네/ 새집을 비로소 건축하니 아름다운 징조 절로 나는 도다/…부인에게 이집 주어 연매제사 올려 상서로운 일 열고 왕모에게는 복을 받아 장수를 누리리라’<원현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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