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파천(播遷)으로 얼룩진 대한제국
칼럼-파천(播遷)으로 얼룩진 대한제국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1.18 16:0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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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파천(播遷)으로 얼룩진 대한제국

파천이란 ‘임금이 도성(都城)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던 일’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서울 중구 정동에 남아 있는 러시아 공사관은 조선 26대 국왕이며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이명복)이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1년간 란(亂)을 피해 살던 곳이다. 왕비가 일본인에게 살해되고 국왕 목숨도 위태롭게 되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하고 말았다. 이에 1년에 걸친 황제의 나라 탈출극을 살펴본다. 1894년 5월 31일 가렴주구(苛斂誅求)와 학정에 지친 농민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나 전주성이 함락되고 고부와 고창을 비롯해 전라도 6개 고을 군수들은 도주했다. 어전회의에서 고종은 청나라 군사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청나라 군사가 들어오자 이미 조선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사가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어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서 전쟁을 벌이니, 이게 청일전쟁이다. 이후 조선은 외세에 짓밟혀 그야말로 상처투성이의‘만신창이’로 변신해 갔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왕이란 자는 일신의 호신을 위하여 일곱 번이나 왕궁을 버리고 탈출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미국, 영국, 불란서 공사관에서는 거부를 당하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받아들여 피신을 하게 된 사건이다. 이를 조선 말, 건양(建陽) 1년(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에 걸쳐 고종과 태자가 친(親)러시아 세력에 의하여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파천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 번은 성공했고 나머지는 미수에 그쳤다. 1894년 청일전쟁 와중에 ‘미관파천(美館播遷)’과‘영관파천(英館播遷)’미수 각1회, 1896년 왕비 민씨 살해사건 직후 성공한 ‘아관파천’1회, 1897년 대한 제국 선포 직후 ‘미관파천’ 미수 1회와 1905년 러일전쟁 도중 ‘미관파천과’, ‘불관파천(佛館播遷)’미수 각 1회, 도합 5개국 7회다. 미국과 파천을 수용한 러시아는 막대한 이권을 챙겼다. 경인철도 부설권이 미국에 넘어갔다. 운산금광 채굴권도 미국에 넘어갔다. 함경도 경원과 종성 광산은 러시아에 넘어갔다. 압록강과 울릉도 벌목권도 러시아로 넘어갔다. 1년 만인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바꾸고 황제국 임을 선언했다. 환궁할 때 고종은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았다. 환궁 한 달 전 러시아공사관은 ‘신변보호를 넘어 조선을 차지해야 한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환궁 후인 1897년 9월 22일 고종은 1892년 미국공사관에 무상으로 줬던 북쪽 길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넘겨줬다. 이 길이 지금 ‘고종의 길’로 복원된 옛 대사관저 내부 소로다. 1894년 자기가 부른 외국 군사가 백성을 유린할 때 왕은 미국과 영국 공관 파천을 계획했다. 아관파천 1년 동안 숱한 국가 재산이 러시아와 미국으로 넘어갔다. 1897년 황제 등극 이벤트를 펼칠 때 황제는 뒤에서 미관파천을 계획했다. 1904년 나랏돈을 들여서 왕위 등극 40주년 행사를 준비할 때 황제는 뒤에서 미국공관으로 숨어들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1904년은 정초부터 만주를 두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았다. 조선팔도에 일본군이 속속 상륙했다. 이에 겁을 먹은 고종은 1월에 미국공사관으로 파천을 요청하고 거절당했으나 2월에 또 요청을 했는데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런 조선의 왕을 본 미국 공사 알렌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일찍이 구만리를 돌아다녀 보고 4000년 역사를 보았지만 한국황제와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프랑스공사관 파천까지 포함하면, 고종은 자그마치 일곱 번에 걸쳐 타국 공관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그때마다 더더욱 지도자가 필요한 때였고, 그때마다 나라는 어지러웠다.

1905년 나라가 만신창이로 쓰러질 때 황제라는 사람은 또다시 미국과 프랑스에 몸을 기대려 했다. 열강은 그때마다 자기네 국익을 앞세워 파천을 거부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 휘하 대신들을 상대로 조약을 맺고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했다. 일본 동경시내 아오야마(靑山) 외국인 묘역에 있는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의 묘비명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오호! 비상한 세대에 비상한 인물이 비상한 재주를 갖고 태어났으나, 끝내 비상한 공을 이루지 못하고 비상한 죽음이 있었다. 후세사람들은 대한제국 말의 풍운아·비운의 주인공·미완성 영도자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엊그제 11월 17일이 국권을 빼앗겼던 뼈아픈 날이었기에 한 번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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