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훈 칼럼-야당 대표의 단식
강남훈 칼럼-야당 대표의 단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1.28 14:3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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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훈/본사 부사장·주필
강남훈/본사 부사장·주필-야당 대표의 단식

5공화국 시기인 1983년 5월18일. 가택연금 중이던 김영삼(YS) 전 신민당 총재는 군사독재에 맞서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YS는 언론통제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인사 복직, 정치활동 규제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5개항을 요구했다. 정부의 보도통제로 YS의 단식은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YS에게 해외출국을 권하며 회유했다. YS는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YS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서울대병원에 강제로 입원했지만 곡기를 끊고 끝까지 버텼다. 그의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은 가택연금 해제로 이어졌고,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YS는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인 2000년 자신의 회고록에서 “내가 단식을 시작할 때는 죽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죽겠다는 각오로 시작한 단식을 살아서 싸우겠다는 결의로써 끝냈다”며 “단식은 나에게 용기를, 다른 야권인사들에게는 각성을 주었던 것”이라고 술회했다.

3당 합당(合黨)이 있었던 1990년에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지방자치제 전면실시, 보안사령부 해체 등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나섰다. 지방자치제는 1987년 대선, 1988년 총선에서 모든 후보와 정당의 공약이었지만 3당 합당 이후 폐기 수순을 밟고 있었다. 결국 단식 13일 만에 여야 합의로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면서 DJ는 단식농성을 풀었다.

목숨을 건 단식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주(周)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곡기를 끊고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은 백이(伯夷)·숙제(叔齊) 이야기, 20세기 초 여성참정권을 주장했던 영국의 ‘서프러제트(Suffragette, 여성참정운동과 그 운동가들)’ 투쟁,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반대와 이슬람과 힌두교의 화합을 요구하며 78세의 나이로 3주간 단식투쟁을 벌인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등도 단식을 투쟁수단으로 삼았다. 단식은 약자가 불의(不義)에 맞서 선택할 수 있는 극단적 의사 표현이다. 군사정권 시절 야당정치인은 단식투쟁을 통해 지지층을 결집하고 권력자의 양보를 요구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지난 20일부터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황 대표는 단식에 들어가면서 현 여권을 향해 세 가지를 요구했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종료 철회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포기,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 공직선거법 개정안 철회 등이다. 지소미아는 정부가 종료 6시간을 남기고 지난 22일 조건부 종료연기를 결정해 파국은 면했다. 그러나 공수처법과 연비제 등 선거법(27일 국회 본회의 부의)은 계속 진행형이다. 민주당은 선거법의 경우 내년 총선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는 12월17일 이전 처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황 대표는 “죽기를 각오하고 있다”며 “(차가운 비바람이) 잎은 떨어뜨려도 나무 둥지를 꺾을 수는 없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그는 단식 8일째인 지난 27일 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다. 의료진이 비상대기하며 수시로 건강상태를 체크했지만 ‘노숙단식’으로 인해 건강은 계속 악화됐다. 주위에서 권하는 ‘병원행’을 완강히 거부한 채 (단식을)계속이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그는 28일 새벽 의식을 회복한 뒤 단식에 다시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의 단식 기간 중 홍준표 전 대표 등 한국당 관계자는 물론이고, 이낙연 국무총리와 이해찬 민주당 대표 등 각 정당 대표들과 유승민 의원 등도 단식 텐트를 찾았다. 한국당 의원들도 패스트트랙(신속안건처리) 저지에 전의(戰意)를 불태웠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28일 “황 대표의 단식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부터 한국당에서 이 단식을 이어 나간다”고 했다. 정미경, 신보라 최고위원은 동조단식에 들어갔다. 황 대표의 단식은 치밀한 정세분석이나 전략을 바탕으로 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초기 당 내외 비판에 직면했다. 일부에선 한국당의 대규모 인적 쇄신을 위한 ‘대내용’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초년생인 황 대표의 즉흥적인 삭발이나 단식 등 ‘파격적 행동’이 예상치 못한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올 경우 그의 리더십은 재평가 될 수 있다. 야당 대표의 결기에 찬 단식이 주목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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