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창원대 교수·현 베이징사범대 외적교수
이수정/창원대 교수·현 베이징사범대 외적교수-“회개하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나니’하시더라” (마 4:17)
어디에서나 교회 십자가를 쉽게 볼 수 있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회개’라는 이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이 말을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고로 무겁게 듣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가치’를 탐구하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이 말을 가치 중의 가치로 인정하는 편이다. (공자의 ‘정 正’, 부처의 ‘도 度’, 소크라테스의 ‘지 知’와 더불어 예수의 이 말을 이른바 ‘궁극의 철학’으로 손꼽는다.) 종교적-신학적인 편향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때 그렇다. 기독교의, 특히 신약세계의,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언어 중 가장 핵심적인 한 마디로 주목한다. 이 말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잘 읽어보면 여기엔 ‘비로소…이르시되’라는 보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예수의 첫 공식적 발언이라는 말이다.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하물며 이 경우는 이른바 ‘신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내부에서는 심지어 신 자신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특별하고도 특별한 존재의 말이다. 이천년 넘게 전 세계적 규모로 엄청난 추종자를 갖는 존재의 말이다. 이게 특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는 왜 하필 ‘회개하라’는 말로 그의 공식적인 ‘전파’활동을 시작했을까…
그런데 이른바 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이 말이 황당하게 들리기도 한다. 내가 뭘 잘못했냐는 것이다. 나름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으로 대뜸 반발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이런 반발이 터무니없다고 단정한다. 귀납적 논리를 적용해볼 때, 우리 인간들 중에 잘못과 죄에서 예외인 존재는 전무에 가깝다고 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한 예수의 기준으로 볼 때는 더욱 그렇다.
나는 한때 ‘인간학’을 강의하면서 막스 셸러가 정리한 서양의 전통적 인간관 다섯 가지를 학생들에게 소개해주곤 했는데, 그 첫 번째 ‘종교적 인간’의 내용적 핵심이 ‘피조물’(ens creatum)과 ‘죄인’(pecator)이라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이 대전제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혹은 부담을 느낀다. 그러나 이건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른바 선악과로 인한 아담과 이브의 원죄 운운은 그 상징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그 상징이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이 전제를 현실 속에서 적나라하게 확인한다. 세상에 넘쳐나는 감옥 안의 수감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이나 티비의 뉴스를 보더라도 죄의 보편성을 확인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그건 현상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의 모든 삶이 예외 없이 ‘고’(苦, dukka)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건 저 석가모니 부처가 확인해준다. ‘일체개고’(모든 것이 괴로움이다), 그게 저 불교의 대전제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2고 3고 4고 8고 108번뇌…그런 걸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마치 형벌과 같다. 형벌은 애당초 누가 받는 것인가. ‘죄인’이 받는 것이다. 이게 현상학적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 확실한 것이다. 현상을 뒤집어 읽으면 그렇게 된다.
오늘도 우리는 온갖 형태의 뉴스에서 그 죄들을 전해 듣는다. 부귀공명을 누리는 경제인 정치인 공직자 유명인들은 아예 단골이다. 그래서 예수의 저 말은 2000년 넘어 지금 여기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나니”
상하좌우 동서남북 남녀노소 전후원근 다 마찬가지다. 회개하기 바란다. 용서와 구원이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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