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회개하라…”
아침을 열며-“회개하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2.01 17:0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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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교수·현 베이징사범대 외적교수

이수정/창원대 교수·현 베이징사범대 외적교수-“회개하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나니’하시더라” (마 4:17)

어디에서나 교회 십자가를 쉽게 볼 수 있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회개’라는 이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이 말을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고로 무겁게 듣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가치’를 탐구하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이 말을 가치 중의 가치로 인정하는 편이다. (공자의 ‘정 正’, 부처의 ‘도 度’, 소크라테스의 ‘지 知’와 더불어 예수의 이 말을 이른바 ‘궁극의 철학’으로 손꼽는다.) 종교적-신학적인 편향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때 그렇다. 기독교의, 특히 신약세계의,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언어 중 가장 핵심적인 한 마디로 주목한다. 이 말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잘 읽어보면 여기엔 ‘비로소…이르시되’라는 보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예수의 첫 공식적 발언이라는 말이다.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하물며 이 경우는 이른바 ‘신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내부에서는 심지어 신 자신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특별하고도 특별한 존재의 말이다. 이천년 넘게 전 세계적 규모로 엄청난 추종자를 갖는 존재의 말이다. 이게 특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는 왜 하필 ‘회개하라’는 말로 그의 공식적인 ‘전파’활동을 시작했을까…
여기엔 ‘잘못’과 ‘죄’라는 것이 전제돼 있다. 우리 인간들의 잘못과 죄다. 그걸 스스로 깨우치고 뉘우치라는 말이다. 다시는 그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는 말이다. 맥락과 뉘앙스를 보면 이건 권유가 아니라 외침이자 명령이다. 그래서 이건 사실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말이기도 하다. 동헌에서 듣는 사또마님의 “네 죄를 네가 알렸다!”나 경찰이나 검찰의 취조실에서 듣는 “너의 죄를 솔직히 자백해!”라는 말보다, 혹은 예전에 많이 듣던 “자수하여 광명 찾자”보다 더 무서운 말이다. 왜냐하면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 즉 내가 인정하건 말건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고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벌을 줄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회개하라’고 하는 건 자기의 잘못과 죄에 대한 ‘자각’과 ‘자인’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자각과 자인이 이미 문제해결의 절반이 되기 때문이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게 여기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 말에는 이미 ‘용서’와 ‘구원’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실은 엄청난 사랑의 발언이 된다. 모든 죄인에 대한, 죄인일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의 발언인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이 말이 황당하게 들리기도 한다. 내가 뭘 잘못했냐는 것이다. 나름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으로 대뜸 반발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이런 반발이 터무니없다고 단정한다. 귀납적 논리를 적용해볼 때, 우리 인간들 중에 잘못과 죄에서 예외인 존재는 전무에 가깝다고 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한 예수의 기준으로 볼 때는 더욱 그렇다.

나는 한때 ‘인간학’을 강의하면서 막스 셸러가 정리한 서양의 전통적 인간관 다섯 가지를 학생들에게 소개해주곤 했는데, 그 첫 번째 ‘종교적 인간’의 내용적 핵심이 ‘피조물’(ens creatum)과 ‘죄인’(pecator)이라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이 대전제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혹은 부담을 느낀다. 그러나 이건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른바 선악과로 인한 아담과 이브의 원죄 운운은 그 상징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그 상징이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이 전제를 현실 속에서 적나라하게 확인한다. 세상에 넘쳐나는 감옥 안의 수감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이나 티비의 뉴스를 보더라도 죄의 보편성을 확인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그건 현상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의 모든 삶이 예외 없이 ‘고’(苦, dukka)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건 저 석가모니 부처가 확인해준다. ‘일체개고’(모든 것이 괴로움이다), 그게 저 불교의 대전제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2고 3고 4고 8고 108번뇌…그런 걸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마치 형벌과 같다. 형벌은 애당초 누가 받는 것인가. ‘죄인’이 받는 것이다. 이게 현상학적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 확실한 것이다. 현상을 뒤집어 읽으면 그렇게 된다.

오늘도 우리는 온갖 형태의 뉴스에서 그 죄들을 전해 듣는다. 부귀공명을 누리는 경제인 정치인 공직자 유명인들은 아예 단골이다. 그래서 예수의 저 말은 2000년 넘어 지금 여기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나니”

상하좌우 동서남북 남녀노소 전후원근 다 마찬가지다. 회개하기 바란다. 용서와 구원이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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