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인연의 소중함을 알자
칼럼-인연의 소중함을 알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2.03 16:05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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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산스님/금인산 여래암 주지
범산스님/금인산 여래암 주지-인연의 소중함을 알자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어머니의 양분을 빨아먹으며 한 몸속에 살다가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울지 않고 태어난 사람 없고, 태어나면서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거라고 생각한 사람도 없다. 부모님은 선택의 여지가 없고, 바꿀 수도 없다.

부모는 자녀의 양육을 위하여 허리가 휘도록 일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편할 날이 없다.

특히 어머니는 자신의 고통보다는 자녀들의 아픔과 고통을 해소 해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놀라운 인내력을 발휘하셨기 때문에 남자의 뼈보다 여자의 뼈가 더 가볍고 검은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부모님의 깊은 마음을 알지 못한다. 부모님들도 가끔은 잘못한 일 때문에 행복의 길보다는 불행의 가시밭길에서 몸부림치며 가슴아파한 때가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3’이란 숫자는, ‘엄마·아빠·나’와의 삼각관계이다.

또한 ‘불·법·승’, ‘천·지·인’, ‘가위·바위·보’, ‘전생·현생·내생’등 ‘3’이란 숫자는 누구나 좋아한다. 부모의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밝은 낮이며 부자이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어두운 밤이며, 가난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에게 반항하는 불효자도 있다. 불효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은 독사에 물려있는 것보다 더심 한 고통의 연속이다. 지금의 어린이도 어른이 되면 자식을 두게 된다.

그러니까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라. 그동안 입은 은혜가 허공보다 큰 것을 알고, 참회의 시간을 가져보자. 부모님 은혜를 갚을 생각은 않고, 자신의 처지가 어려우면 부모 탓을 하며, 성장과정에서의 조그마하고 얕은 원망만 있어도 그것은 꼭 갚으려드는 자식도 있다.

부모자식의 인연은 전생(前生)에 빚진 인연이다. 서로가 그 빚을 갚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 ‘나’부터 부모님께 효행을 다하면서 아랫사람들을 가르쳐나가야 한다.

그 다음은 ‘내’차례가 되니까. 요즘은 자식이 상전이고, 부모는 하인이라는 말이 있다.

만약 ‘내’가 부모님을 하인취급하면 그걸 보고자란 ‘내’자식이 어른이 된 뒤에 효도를 하겠는가? 왕대밭에서 왕 대나고, 효자 밑에서 효자 나온다, 자식은 부모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한다. 부모는 자녀를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하여, 제 역할을 다하는 사회인이 되도록 교육할 임무와 책임이 있다. 나이 들어 힘과 돈이 떨어진 말년의 궁핍과 고독을 생각해보라. 고부(姑婦)간의 인연은 전생에 씨앗의 인연이다. 서로가 반드시 화합하라.

형제간의 인연은 전생에 경쟁관계였다. 서로 양보하라. 유산분배 때도 자녀들이 보고 있다. 먼저 양보하라. 옷깃한번 스친 것도 삼생(三生)의 인연이며, 길에서 낮선 사람과 말 한마디 나눈 것도 수생(數生)의 인연이다. 처음 본 사람이라도 서로가 친절히 대하도록하자.

같은 공간에서 사는 인연은 수십생(數十生)의 인연이다. 서로 도움주면서 살아가자.

사제지간의 인연은 수백생(數百生)의 인연이다. 스승과 제자는 마땅히 존경과 보살핌을 다하도록 하자. 부부는 천생(千生)의 인연이다. 서로가 정성스럽게 받들어 모셔야한다.

늘 내가 먼저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하면 평화와 행복의 길이 열린다. 서로 이생에서 인연된 것에 감사하자. 우울해하며, 분노하고, 미워하면 공동실패를 재촉하게 된다.

구더기와 파리는 같은 생명체이며,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종(種)의 장벽도 없다.

부모와 자식도 결코 다른 생명체가 아니며, 서로 다르다는 마음의 벽이 있을 뿐이다.

나도 어른이 되었다며 부모를 배신한 것은 음식 다 먹고 나서 그릇을 깨버린 것과 같다.

그늘에서 잘 쉬었으면 갈 때 그 나뭇가지를 베지 마라.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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