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가을의 여인 혁명가 추근 투사
진주성-가을의 여인 혁명가 추근 투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9.12.04 17:0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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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가을의 여인 혁명가 추근 투사

‘경협여협-비밀결사대’라는 영화는 구예도 감독이 황혁, 두우항, 진기환, 하문석, 황추생 등의 배우를 출연시켰는데 아름다운 가을의 여인 혁명가 추근 여사의 일대기로 알려져 있다.

청나라 말기 애국·애족·애향의 상징으로 널리 회자된 여성투사이다. 추근(秋瑾)의 본명은 추규근(秋閨瑾) 호는 단오(旦吾) 또 감호여협이다.

본적은 절강성 신음시이며 주은래. 노신과 함께 3대 호걸이라 말한다.

출생지는 복건성 샤먼이고 조부는 부장관 벼슬을 지내고 부친도 관리로 부호였다. 1890년 16세 때 아버지를 따라 호남성 상탄에 갔고 그곳에서 해상 부호의 아들 왕정균과 혼인해 1남 1녀를 두었다.

1902년 28세 때 남편이 북경성 관리가 되자 따라가고 추근 여사는 열강이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고 사람이 태어나 나라를 구하는 일에 헌신이 중대함을 깨닫고 혁명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면서 남녀평등을 주장하게 된다.

1904년 29세의 추근은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이 2명을 친정에 맡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일본에서 청나라에 반대하는 홍문천지회에 가입하고 절강성 도성장을 통해 서석린, 채원개 등 진보 혁명가를 소개받게 된다.

1905년 30세 때 광복회에 가입해 손문을 알게 되고 곧 중국혁명동지회에 가입하니 여성은 단독 회원이었다.
귀국 후 절강 심계여학교 교사가 되고 상해에서 <중국여보>를 창간했다.

1907년에 산음시에 대통학교를 세우고 부친의 힘을 빌려 상하이로부터 총 250자루, 총알 20만발을 구하게 된다.

무장 봉기를 위해 안휘성 안경시의 서석린과 7월 19일을 봉기일로 정하였는데 서석린이 일주일 앞서 희생되고 추근의 소재가 알려지게 된다.

혁명당원들이 망명을 권하였으나 추근 여사는 산음(사오닝)을 떠나지 않았고 청나라 군대가 대통학교를 포위하자 전투가 전개되어 체포되었다. 7월 15일 새벽에 산음 헌정구에서 참수형을 당하니 32세 였다.

생전의 친구 오지영 여벽성이 시신을 몰래 들고 나와 가매장하였고 추근여사의 아들이 호남성 소산으로 이장했다.

1912년 호남성 장사에 열사 사당을 세우고 유골은 다시 절강성으로 보내니 서호의 무덤에 안장되었다.
추근 여사는 2억 여성들에게 여성 해방을 강력하게 갈망.호소하였다. 손문. 주은래 등이 가장 훌륭한 신여성이라고 평가했다.

절강성 서호에 칼을 든 동상이 세워져 있고 대만 작가 진순신이 추근 여사를 여류시인 혁명가로 소개했다. 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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